1947 보스턴의 서윤복 선수의 신발. 그리고.
달리기에 최적의 기온은 섭씨 6도에서 7도 사이라고들 한다. 생리학적으로 이견이 없는 수치다.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그 미묘한 문턱, 코끝이 살짝 시릴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폐부 깊숙이 박히면, 뜨거운 심장이 내뿜는 열기와 만나 절묘한 밸런스를 이룬다. 그야말로 황금 기온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온도는 이불 속이 세상에서 가장 포근하게 느껴지는 마시멜로 구간이기도 하다. 차가운 바깥 공기와 따뜻한 이불 사이의 온도 차가 클수록, 침대의 중력은 기하급수적으로 강력해진다.
알람이 울린다. 스마트폰 화면은 무심하게 기상 시간을 알리지만, 내 손가락은 그 어느 때보다 날렵하게 스누즈 버튼을 찾아 누른다. 30분만, 아니 10분만, 딱 5분만 더. 이 짧은 시간 동안 내 머릿속에서는 치열한 법정 공방이 펼쳐진다. 운동을 나가야만 하는 당위성을 주장하는 검사와, 오늘 하루쯤은 충분히 쉬어도 된다며 헌법에 보장된 행복추구권을 들먹이는 변호사, 그리고 그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우유부단한 판사까지. 요약하자면 자기 자신을 설득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협상이라는 것을 매일 아침 깨닫는다. 이불 밖은 위험하고, 이불 안은 달콤하다. 이 강력한 중력을 이겨내는 건 순수한 개인의 의지만으로는 불가능에 가깝다. 결국 어떤 임계점에 다다라야 비로소 몸은 움직인다. 그것이 약속 시간이 다가오는 것에 대한 공포감이든, 스스로에 대한 의무감이든, 아니면 단순히 화장실이 급해서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주변 사람들에게, 특히 달리기를 이제 막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강력하게 추천한다. 혼자 뛰지 말고, 러닝크루에 들어가라고. 혹은 마음 맞는 친구들과 단톡방이라도 파라고 말이다. 사람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덜컥 다음 러닝 약속을 잡아버리는 것. 그것은 나약한 나를 움직이게 하는 가장 확실한 강제 집행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타인의 시선에 민감하고, 약속을 어기는 것에 대한 부채감을 견디기 힘들어하는 동물이다. 책임감, 의무감, 그리고 펑크 냈을 때 쏟아질 비난에 대한 두려움. 우리는 가끔 그런 약간의 스트레스를 연료 삼아 운동화를 신어야 한다.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아침 러닝의 90퍼센트는 이미 성공한 것이다. 시작이 반이라는 옛말은 러닝에서는 틀렸다. 러닝에서 시작은 반이 아니라 거의 전부다. 문을 열고 차가운 공기를 마시는 순간, 침대 위에서의 그 치열했던 고민은 봄눈 녹듯 사라지고, 오늘 뛰러 나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뇌를 지배하기 시작하니까. 나조차 이토록 설득하기 힘든데, 하물며 가족이나 동료를 설득해 같이 뛰자고 하는 건 오죽할까. 달리기의 효능을 침 튀기며 설교해 봤자, 그들은 요지부동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주말 아침의 단잠을 방해하는 귀찮은 전도사일 뿐이다. 결국 그들 스스로 마음속에서 어떤 스위치가 켜져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이제 적당히 권하고 만다. 좋은 것도 강요하면 잔소리가 되는 법이고, 훈수가 되는 법이다. 나는 건강한 러너가 되고 싶지, 피곤한 꼰대가 되고 싶진 않으니까.
흔히들 오늘이 내 남은 생애 중 가장 젊은 날이라고 한다. 너무나 진부한 표현이라 식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신체 능력이 중요한 달리기에서 이보다 더 뼈 때리는 조언은 없다. 달리기를 잘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오늘 당장 운동화를 신는 게 정답이다. 특별한 기술도, 비싼 장비도, 파트너도 필요 없다. 그저 간편한 복장에 운동화 한 켤레면 세상 어디든 나만의 트랙이 되는, 이토록 가성비 좋고 민주적인 운동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하지만 우리에겐 늘 핑계가 준비되어 있다.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지만, 러너들의 핑계 저장소는 무덤보다 깊다. 날씨가 너무 덥거나 추워서, 비가 올 것 같아서, 미세먼지가 나쁨이라서, 무릎이 시큰거려서, 아직 내 발에 딱 맞는 쿠션 좋은 러닝화가 없어서, 땀 흡수가 잘 되는 기능성 셔츠나 폼 나는 고글 선글라스가 없어서, 심지어 러닝 전용 양말이 준비되지 않아서 못 뛴다고 한다. 나 역시 장비병 환자로서 그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 뭔가 갖춰져야 시작할 맛이 나는 그 기분 말이다.
하지만 얼마 전 보았던 영화 1947 보스턴은 나의 그 알량한 핑계들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영화가 주는 뭉클함과 실화의 힘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해방 직후, 혼란스러운 조국의 상황 속에서 태극마크를 달고 보스턴 마라톤에 출전한 그들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감동이었다. 그런데 러너로서의 본능 탓인지, 내 눈을 사로잡은 건 서윤복 선수의 발이었다.
과장을 조금 보태자면, 그건 어릴 적 학교 복도에서 신던 하얀 실내화 수준이었다. 아무리 미화해서 봐줘도 반스(Vans) 단화 이상의 쿠션감은 없어 보였다. 밑창은 얇디얇은 고무였고, 갑피는 그냥 천 조각에 불과했다. 충격 흡수. 반발력. 통기성. 현대 러닝화가 내세우는 그 어떤 기술적 용어도 적용될 수 없는, 그저 발을 감싸는 헝겊 쪼가리에 가까웠다.
세상에, 그런 실내화 같은 신발을 신고 마라톤 풀코스를 서브 3, 즉 3시간 이내 완주도 아닌, 2시간 20분대에 주파했다고. 믿기지 않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지금 시중 마트에서 파는 가장 저렴한 만 원짜리 운동화를 사 신어도 당시의 국가대표 신발보다는 기능이 좋을 것이다. 그러니 카본 플레이트가 들어간 최첨단 운동화니, 땀 배출이 탁월한 에어로 스위프트 유니폼이니 하는 장비 타령은 그분들 앞에선 명함도 못 내밀 배부른 소리다. 우리는 정말이지, 역사상 가장 복에 겨운 시대를 살고 있다. 장비가 없어서 못 뛴다는 말은, 밥이 없어서가 아니라 반찬 투정을 하느라 굶겠다는 말과 다를 바 없다.
달리기의 즐거움 중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음악이다. 나는 음악과 함께하는 조깅을 사랑한다. 그날의 기분과 날씨에 따라 선곡 리스트는 달라진다. 신나는 케이팝으로 텐션을 올리기도 하고, 빌보드 차트를 들으며 트렌드를 읽기도 하고, 8090 락 발라드를 들으며 추억에 젖기도 한다. 장거리 훈련을 할 때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오디오북을 듣거나, 마음의 평화를 위해 스님의 독경 소리를 듣기도 한다. 단, 심박수를 너무 급격하게 올리는 헤비메탈은 사절이다. 달리다 보면 가뜩이나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음악까지 나를 몰아붙이면 곤란하니까. 30년 전을 기억하는가. 허리춤에 벽돌만 한 워크맨을 차고 달리는 건 혁명이자 힙함의 상징이었다. 건전지 무게까지 합치면 꽤 묵직했지만, 당시에에 그 무게를 훈장처럼 여기며 달렸다. 덜그럭거리는 기계 소음과, 이어폰 줄이 팔에 걸려 빠지는 불편함은 감수해야 할 낭만이었다. 20년 전에는 엄지손가락만 한 엠피쓰리 플레이어에 수백 곡이 들어가는 기적을 맛봤다. 목에 걸고 뛰어도 쇄골을 때리지 않는 가벼움에 감탄했다. 그리고 10년 전부터는 엉킨 줄을 풀 필요 없는 블루투스 이어폰의 시대가 열렸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스마트폰 하나로 전 세계의 모든 음악을 실시간으로 끌어와 귀에 꽂고 달린다. 저장 용량을 걱정할 필요도 없고, 배터리를 갈아 끼울 필요도 없다. 귓구멍에 쏙 들어가는 무선 이어폰은 아무리 격렬하게 뛰어도 빠지지 않는다. 무거운 기기도, 거추장스러운 줄도, 열악한 신발도 없는 이 완벽한 자유.
이불 속의 유혹만 떨쳐낸다면,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호사스러운 달리기를 즐길 수 있는 축복받은 세대임이 분명하다. 1947년의 그들이 얇은 신발을 신고 보스턴의 언덕을 넘을 때 느꼈을 그 발바닥의 고통을 우리는 겪을 필요가 없다. 테이프가 늘어질까 걱정하며 같은 노래를 반복해 들을 필요도 없다. 우리는 그저 선택하고, 누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니 더 이상의 핑계는 접어두자. 날씨 탓, 장비 탓, 컨디션 탓은 이제 유효기간이 지났다. 지금 이 순간, 귀에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걸고, 발에는 1947년의 그들보다 훨씬, 아니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좋은 신발을 신고, 문을 나서기만 하면 된다. 문밖은 생각보다 춥지 않다. 그리고 세상은 게으름을 이기고 나온 달리는 자에게 꽤 상쾌한 바람과, 멋진 풍경을 공짜로 내어준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이자, 가장 확실한 행복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