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보단 친구지

by 혜일

거리두기가 4단계로 조정된 이후, 무더위까지 겹쳐 아이는 놀이터에서 잘 놀지 못했다. 길 건너 다른 아파트에 사는 단짝 친구 H와 만나지 못한지도 벌써 두 주는 훌쩍 지나 있었다. H는 큰 아이와 다른 반임에도 항상 함께 하교를 했다. 그리고 꼭 우리 단지 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다가 함께 태권도 학원을 가곤 했다. 매일 보던 사이인데 여름 방학을 하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자주 못 보게 되었으니, 아이들은 서로 놀고 싶어 안달복달하던 참이었다.



-H는 집에서 잘 놀아? E는 너무 심심해 보여.

-그럼 H 좀 하루 빌려가요.^^ 안 그래도 H가 E랑 놀고 싶다고 매일 노래 불러요.



H의 엄마와 며칠 전 이렇게 카톡을 주고받은 후 우리 집에서 놀기로 약속한 날이 되었다.



"띵동-"


오전 11시 정각, H가 도착했다. H의 엄마는 자신의 차로 아파트 현관 앞에 아이만 내려주고는 동생들 때문에 바로 차를 돌렸다. 오랜만에 친구 얼굴을 보자 큰 아이의 까만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선물을 받은 듯 들뜬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나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해가 너무 뜨거워 밖에서 놀기는 힘든데 남자아이들 둘이 집 안에서만 잘 놀 수 있을까 하는. H의 엄마는 동생들과 볼일을 본 후 오후 4시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 전에도 서로의 집에서 자주 놀긴 했지만 H가 엄마 없이 이렇게 오래 있어본 적은 처음이었다. 5시간 동안 이 아이들은 과연 심심해하지 않고, 싸우지 않고 잘 놀 수 있을까.






두 아이가 처음 만났던 날을 아직도 생생히 기억한다. 만남의 장소는 역시나 단지 안의 놀이터였다. 첫 만남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큰 아이와 친구 H는 당시 국민 운동화였던 검은색 아*다스 운동화를 똑같이 신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신발 안에 신은 줄무늬 양말까지 같은 디자인이었다.


H의 엄마는 놀이터 옆 어린이집을 다니던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나는 큰 아이의 친구를 만들어주고 싶어 마침 놀이터를 어슬렁거리던 참이었다. 차를 타고 먼 거리의 유치원에 다녔던 아이는 졸업을 하고 나니 동네 친구가 없었다. 게다가 아이는 1학년에 입학했지만 코로나 때문에 등교도 못하고 있었다. 놀이터가 아니면 또래 동네 친구를 사귀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가 궁한 큰 아이를 대신해 시소를 타던 H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몇 살이야? 8살이에요. 너도 먼우금 초등학교 1학년이야? 네, 저는 1학년 2반이에요. 그래? E는 1반인데. 그럼 서로 친구 하면 되겠다!


알고 봤더니, H네는 이 동네로 이사 온 지 두 달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H의 엄마 역시, 놀이터에서 자신의 아이와 또래처럼 보이면 무조건 다가가서 몇 살이야?라고 물어보던 참이었다고 했다. 큰 아이처럼 H도 친구가 필요했기에. 마침 지나가시던 단지 내 어린이집 선생님까지 갑자기 오셔서, 너희 둘이 너무 잘 어울려. 친구 하면 딱 좋을 것 같다.라고 거들고 가셨다.


견우와 직녀를 이어주던 오작교 까마귀들처럼, 엄마들과 어린이집 선생님까지 합세해 두 아이를 놀이터에서 친구 사이로 연결해주던 날. 정작 큰 아이와 H는 첫 대면이라 그런지 서로 쭈뼛쭈뼛하다가 제대로 못 놀고 헤어졌던 것 같다. 나무 그늘 사이로 오월의 햇살만 놀이터를 차지하고 쭉쭉 스트레칭을 하다 싱겁게 사라진 날이었다. 하지만 나는 두 아이가 좋은 친구가 될 거라고, 집 안 청소 대신 놀이터에 나와 어슬렁거리길 잘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H: 너 그동안 뭐하고 지냈냐?

E: 그냥 뭐, 심심~하니까 책이나 읽고 지냈지 뭐.



두 아이의 대화를 듣다가, 나도 모르게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했다. 웃음이 나면서도 한 방 먹은 느낌이랄까. 나는 아이가 집에 있는 동안 책이 재밌어서 그렇게 골똘히 보는 줄로만 알았다. 하도 열심히 보길래 다른 동네 도서관까지 다니며 아이가 볼만한 책들을 열성적으로 날라다 주고 있었다. 바빠 보이는 엄마는 아무래도 놀아줄 것 같지 않고, 동생은 유치원 가고, 놀만한 친구는 없고. 아이에게 아직 책은 꿩 대신 닭 같은 대상이었다. 그동안 너는 참 심심했겠다. 친구 앞에서 속엣말을 하는 아이를 보면서 그 마음을 제대로 읽어주지 못했던 것 같아 미안했다. 그래, 책보단 친구지!


두 아이는 나의 우려를 깨뜨리고 만난 시간부터 헤어지는 시간까지 한 시도 쉬지 않고 놀았다.


1교시 - 알까기 대결

2교시 - 레고 블록 만들기

3교시 - 의자 쌓기 놀이

<점심시간>

4교시 - '곤충의 왕은 누구인가' 영상 보기

5교시 - 종이 한 장으로 사슴벌레, 귀뚜라미 만들기

6교시 - 고무 딱지 치기 대결

7교시 - 다시 레고 블록 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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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스스로 만든 놀이 시간표는 헤어지기로 약속된 시간이 지나도록 끝날 줄을 몰랐다. 일주일 중 단 하루라도 아이들이 이런 식으로 놀이 시간표를 짜서 마음껏 놀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생님, 부모라는 이름 아래 일방적으로 짜인 학교, 학원 수업 프로그램 대신 말이다.


아이들은 안이든, 밖이든, 무엇을 가지고 놀든 환경이나 도구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존재들이었다. 천진난만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봐주는 친구만 있다면.


'자기 대상' 즉, 자신을 바라봐 주는 대상은 개인의 자존감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가장 좋은 자기 대상은 '항상, 한결같이, 판단 없이 자신을 바라봐주는 누군가'라고 한다. 사람들은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성인이 되어서도 평생을 이러한 자기 대상을 찾아다닌다는 것이다.(김선호, 박우란 '초등 자존감의 힘', p.214)


내가 어떤 처지이든지 간에 변함없이 나에게 달려와주고, 나를 지지해줄 수 있는 사람. 그런 대상이 바로 진짜 친구이지 않을까 싶다. 두 아이가 어릴 때뿐만 아니라 커서도 이렇게 좋은 친구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 저희들끼리 신나게 노는 모습에 나는 오랜만에 아이들 곁에서 한 발짝 물러나 그 티 없는 풍경을 하염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나도 멀리 있는 친구들이 보고 싶어 질투가 났다. 클릭 한 번이면 집 앞으로 무엇이든 다 배송되는 시대. 아주 사소한 필요도 즉각 채울 수 있는 물건은 넘쳐나지만, 그것들로 채울 수 없는 주린 영혼과 마음에는 '친구'만 한 게 없겠지. '띵동'하고 벨 소리가 울리면 나도 내 친구가 집 앞으로 선물처럼 배송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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