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번 추석에는 사정상 친정에 가기 어려울 것 같아 날짜를 조금 앞당겨 다녀왔다. 가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 저녁 뭐 먹어요? 회 좀 떠갈까? 이미 카톡으로 집에 이런저런 과일이 있으니, 과일은 사 오지 말라는 엄마의 연락을 받은 뒤였다. 명절 때가 아닌지라 급작스런 딸네 가족들의 방문에 엄마는 저녁 메뉴를 고민하실 것 같았다.
"그냥 와! 아빠가 고기 사다 놓으셨어. 뭐 더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이따가 나가서 사 오든지."
엄마의 핵심은 그냥 오라는 뜻이셨지만 아무리 친정이라도 이젠 빈손으로 가는 게 더 어려운 나이가 되었다. 친정 근처에서 고기와 함께 먹을만한 메뉴를 사기로 하고 일단 그냥 도착했다.
친정집 현관문을 들어서자 집 안은 매콤한 멸치조림 향내로 진동했다. 엄마는 우리가 오기 직전까지 밑반찬을 만들고 계셨던 것이다. 멸치조림을 보자 군침이 돌았다. 친정 집 건너편에 위치한 횟집에서 맛있다던 해물찜을 굳이 사 오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엄마의 밑반찬을 하나하나 음미하는 데 바깥 음식은 왠지 갑자기 끼어든 방해꾼처럼 느껴졌다.
저녁 시간 한쪽에선 돼지고기를 굽고, 그 곁으론 엄마가 차려내신 밑반찬이 가득했다. 말이 밑반찬이지 하나하나 정성이 안 들어간 반찬이 없다. 메인 메뉴는 돼지고기 목살이었지만 내 관심은 온통 엄마의 밑반찬으로 쏠렸다. 먼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름 반찬, 오이지무침을 집어 들었다. 얼핏 보기에 반찬의 모양새는 내가 집에서 만들던 것과 비슷해 보였다.
지난여름, 엄마에게 받은 오이지 덕분에 나는 어릴 적 향수를 느끼며 대 여섯 번 정도 오이지무침을 만들 수 있었다. 절인 오이지를 송송 썰어서 소금기가 빠지도록 물에 담가 두었다가 물기는 두 손으로 꼭 짜내고 고춧가루, 파, 참기름, 통깨, 그리고 설탕 조금을 추가하면 되는 것이었다. 접시에 담아 올린 누렇고 찌글찌글한 오이지를 보면 꼭 피다 만 꽃 모양 같았다. 소금에 절여져 투명해진 오이 속살을 바라보며 나는, 여름이면 같은 반찬을 만들어내셨던 할머니나 엄마를 떠올렸다. 받아 온 오이지를 버무려 무친 것뿐인 주제에, 이제는 이런 반찬도 만드는 나 자신을 내심 뿌듯해했다.
이번 여름에 오이지무침을 섭렵한 나는 엄마가 만드신 오이지무침도 내 것과 맛이 비슷하리라 짐작했다. 하지만 젓가락으로 오이지 하나를 집어서 입 안에 넣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엄마의 것과 내가 집에서 만든 것은 식감 자체가 달랐다. 분명 같은 오이지인데 엄마의 것은 아삭아삭했다. 물을 머금고 있던 오이가 맞나 싶을 만큼 그 식감이 살아있었다. 오이지 옆에 놓여있던 고추 장아찌 맛은 또 어떤가. 과하게 맵지도 달지도 짜지도 않게 입 안을 개운하게 하는 맛이었다. 엄마가 홍합을 넣어 끓여내신 뽀얀 미역국은 심심하면서도 깊은 맛이었다. 내가 끓인 미역국은 색이 탁한 것과 달리, 엄마의 미역국은 미역 자체의 검푸른 바다 빛이 맑은 국물 안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나의 엄마, J.O 여사는 41년 전 결혼과 동시에 시부모뿐만 아니라 나의 증조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빠의 여동생들과도 함께 한 집에서 사셨다. 할아버지도 첫째셨고 아빠도 외아들이셨기에 명절이나 집 안 행사의 구심점은 항상 우리 집이었다. 게다가 우리 사 남매를 낳고 키우셨으니 엄마는 밥을 짓고 음식을 해서 먹이는 일만큼은 평생을 갈고닦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녁을 다 먹고 엄마와 나, 그리고 언니가 함께 둘러앉은 자리에서 엄마의 말이 신음처럼 새어 나왔다.
"그러고 보면 나는 남들 거둬 먹이는 게 팔자야, 팔자."
잠시 정적이 흐르고 나는 마음이 서늘해졌다.
"그런데 너희들 어릴 때는 그게 힘들다고 생각 안 했어. 짜증도 안 나고 재밌었지."
이내 이어진 엄마의 말에 나는 안도했다. 순간 60대 중반의 엄마 얼굴에 나의 젊었던 엄마 얼굴이 겹쳐졌다. 내 기억에 엄마의 얼굴은 늘 곱고 화사했다. 지금도 엄마는 남루한 복장으로 찾아온 손자들에게 새 옷을 입히며 부잣집 도련님처럼 뒤바꾸는 마법을 자주 부리시곤 한다. 엄마는 과도한 집안 살림 탓에 찌들고 힘드셨을 테지만 스스로를 가꾸고 단장하는 여유만큼은 놓치지 않으셨다. 하지만 어찌 그 시절이 힘들지 않으셨을까.
유년기와 사춘기를 보내고, 청소년 시절 즈음부터 나는 엄마를 안쓰러운 대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곱고 아름다운 엄마의 얼굴 뒤에 가려진 잿빛 그늘, 립스틱 바른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한숨, 그리고 보이지 않는 가슴속 응어리 같은 것들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그런 엄마의 삶을 존경했지만 감히 꿈꿀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닮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수십 년이 지나 엄마의 기억도 갈고 닦여 좋은 것만 남았겠지 싶다. 엄마의 말처럼 엄마가 된다는 것은 팔 할쯤은 자신이 아닌 타인을 먹여가며 사는 삶이다.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노시인은 그 흔적이 별처럼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생진 시인의 '벌레 먹은 나뭇잎'의 구절구절을 읽을 때마다 나는 나의 엄마가 떠오른다.
나뭇잎이
벌레 먹어서 예쁘다
귀족의 손처럼 상처 하나 없이
매끈한 것은 어쩐지 베풀 줄 모르는 손 같아서 밉다
떡갈나무 잎에 벌레 구멍이 뚫려서
그 구멍으로 하늘이 보이는 것은 예쁘다
상처가 나서 예쁘다는 것이 잘못인 줄 안다
그러나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이생진 <벌레 먹은 나뭇잎>
나는 엄마가 해준 밥과 반찬뿐만 아니라, 엄마의 젊음과 꿈, 시간까지 함께 먹고 자랐다. 결혼과 동시에 전업 주부로 살아오신 엄마도 한 때 멋진 제복을 입고 여군을 꿈꾸던 젊은 날이 있었다. 음식에 대한 엄마의 감각과 소질을 발견한 어느 한식집 사장님은 엄마와 함께 일하자고 권유하기도 하셨단다. 하지만 엄마는 아들 딸들 밥 먹이는 것 때문에, 살림이 흐트러질까 봐 선뜻 집을 나서지 못했다고 얘기하신 적이 있다. 나는 그 일을 얼마 전에야 알게 되었다.
엄마는 밥상을 치운 후에도 막 쪄낸 안흥 찐빵과 검은 알이 박힌 옥수수, 반듯이 썬 수박 등을 내어오시며 끊임없이 먹으라 하셨다. 다 큰 어른인 내게도 엄마는 여전히 '먹이는' 엄마이다. 어쩌면 먹이는 일만큼은 엄마의 숙명이자 특권일지 모른다. 어릴 적엔 그렇게 밥상 앞에 앉아 깨작거리고, 엄마가 내어놓으신 반찬은 안 먹으면서 꼭 다른 걸 찾아 잔소리를 듣던 나였다. 더 먹어. 많이 먹어. 왜 안 먹어. 오랜만에 듣는 엄마의 잔소리가 듣기 좋았다.
더 먹어. 많이 먹어. 왜 안 먹어. 평소 내가 아이들에게 밥 먹듯이 하는 말들이다. 이제 아이들도 스스로 밥을 먹을 줄 알고, 편식은 할지언정 밥 한 그릇은 제 스스로 비울 줄 아는 나이다. 저희들 딴에는 잘 먹고 있는데 괜스레 엄마가 앞에서 이런 말들을 툭툭 던지면, 그것도 잔소리 같아 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하지만 먹이는 삶을 살고 있는 나로서는 아이들이 제 멋대로 밥 먹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는 것이 쉽지 않다. 반찬을 골고루 먹었으면 좋겠고, 이왕이면 국도 건더기까지 싹 비워줬으면 좋겠다. 마치 차려준 것들을 지금 다 먹지 않으면 아이들의 성장이 멈추기라도 하는 듯 조바심 가득한 나의 마음은 잔소리로 이어지곤 했다.
친정 집을 다시 떠날 즈음, 엄마는 명절 때가 아니라 싸줄 게 없다며 말씀하시면서도 딸네 식구 먹일 것들로 짐을 꾸리셨다. 참기름, 사과, 자두, 포도, 단호박, 생옥수수, 고추 등등 화수분 같은 엄마의 주방에선 먹을거리들이 마르지 않고 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아빠 왈,
"엄마는 꼭 저렇게 뭘 싸 보내야 맘이 편한가 봐."
"안 보내면 서운하지. 친정 엄마는 쥐꼬리까지 싸준다는 데 뭐. 이 정도로."
먹이는 특권을 제대로 누리신 엄마는 밝은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엄마, 나는 하나도 안 서운한데. 그런데 엄마의 음식을 먹고사는 한 나도 어딘가 계속 자라야 할 것 같아. 아직도 자라고 자랄 곳이 많은 것 같아.
전날 저녁 맛있게 먹은 엄마의 고추 장아찌 한 병을 품에 안고는 마음 한편이 뜨거워졌다. 나뭇잎에 딱 붙어있어야 살 것 같은, 갓 태어난 애벌레가 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