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별나다. 잠들기 전에 꼭 책을 읽어달라 한다. 잠에 겨워 눈꺼풀이 다 내려와 있는 얼굴을 하고서도 꼭 "책 읽어줘."란 말을 빠뜨리지 않는다. 내가 책을 읽기 시작하면 그렇다고 말똥말똥한 눈빛으로 책에 집중하는 것도 아니다. 옆에 누워 뒹굴뒹굴하거나 가만히 있는 서랍을 열어 아기처럼 저지레를 쳐 놓는다. 밤이 깊어도 여전히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 아이들의 이 소란한 마음을 동화 속 이야기가 차분히 덮어준다. 얼굴도 모르는 타국의 작가가 흘린 수고와 땀의 온기가 문장과 문장 사이에 배어있는 듯하다. 제대로 듣고 있든 아니든 상관없이, 더 따뜻한 마음으로 자라고 글을 읽어준다.
아이들만큼 나 역시 별나다. 아이들을 재우고 피곤해진 눈을 치켜뜨고서도 책을 펼친다. 아이들이 잠들고나서야 비로소 고요해진 시간은 내게 두 번째 하루가 시작된 것 같은 환상을 품게 한다. 이 고요한 시간에 술술 읽히는 글을 만나는 것은 언제나 좋다. 백수린 작가의 산문집 '다정한 매일매일'을 읽었다. 소설과 빵, 이 매력적인 글감들과 작가의 추억 이야기가 참 포근하다. 요즘처럼 차가워진 밤공기에 딱 끌어안고 싶은 이불처럼.
그러나 세상의 글들이 어찌 따뜻한 온기만 품고 있을까. 한여름, 열대야로 축 처진 몸에 시원한 냉기를 불어넣는 인견이불 같은 글들도 많지 않은가. 헤밍웨이의 초기 단편 소설, '인디언 부락'을 읽었다. 금세 마음이 서늘해졌다. 서너장 남짓한 이 짧고도 건조한 글 안에는 인간의 탄생과 죽음에 대한 고통이 압축적이고 극적으로 서려있었다. 분주한 일상을 사느라 무뎌져 있던, 더 큰 세계에 대한 감각을 잠시나마 곧추세워주는 이야기들. 더 어렸을 때 이런 글들을 많이 찾아 읽지 못한 것에 조금 후회가 되기도 한다.
쓰지도 못했는데 읽고만 싶은 밤. 읽기를 멈출 수 없는 이런 밤은 빚진 자의 마음이다. 지금도 날을 지새우며 글을 짓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생각하며.
그러고 보면 책이 이불을 닮았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활자들이 모여 문장을 만들고, 씨줄 같은 문장들은 서로 엮이고 엮여 한 편의 글을 만든다. 책을 열어 글을 보고 있노라면 그래서 이불을 펼친 것 같다. 날줄은 없고 씨줄만으로 이루어진 이불. 이렇게 보이는 글들이 때론 따뜻함으로, 때론 서늘함으로 마음 깊이 와닿는다. 드물지만 어떤 문장들은 굳이 메모하지 않아도 가슴속에 새겨지기도 한다. 그런 문장들은 어떤 순간 선명한 도장이 되어 이해할 수 없어 애매했던 삶의 장면들을 명명해주곤 했다.
"소설가로서 나는 언제나 서사의 매끄럽지 않은 부분, 커다란 구멍으로 남아 설명되지 않는 부분에 마음을 주는 사람이다. 소설에서도, 그리고 인생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은 그런 지점들이 아닐까? 우리는 삶과 세계를 하나의 매끄럽고 완결된 서사로 재구성하려 애써 노력하지만, 사실은 끝끝내 하나가 될 수 없는 단편적인 서사들을 성글게 엮으며 살아갈 뿐이니까. 그리고 바로 거기, 언어로 설명할 수 없고 때로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도 없는, 서사와 서사 사이의 결락 지점. 그런 지점이야말로 문학적인 것의 자리일 거라고 나는 믿고 있다."
(백수린, '다정한 매일매일', p.89)
백수린 작가는 '다정한 매일매일'에서 위와 같이 소설가의 마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언어'라는 도구의 한계 속에서도 더 촘촘하고 풍성한 서사를 엮고 싶어 하는 마음. 그 소설가의 모습이 손수 이불을 짓는 장인 같다. 누군가에게 이불을 덮어주는 따뜻한 상상을 하며 한 땀, 한 땀 정성을 다하는.
할 일을 다 마치고 잠자리에 들기 전, 아이들이 잠든 방을 습관적으로 꼭 열어본다. 무사히 잘 것을 알지만 그래도 잘 자고 있나 확인하는 것이다. 두 녀석은 보통 이불을 걷어찬 채 맨몸으로 잠을 자고 있다. 아이들이 다시 걷어찰 줄 알면서도 가만히 이불을 덮어준다. 밤이 지나 개운해진 몸으로 새 날을 맞이할 수 있길 바라며.
계절이 점점 차가워진다. 세상도 갈수록 어둠 속이다. 이 계절과 세상을 맨몸으로 부딪히며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을까. 작가의 마음이란 이들의 작은 인기척을 모른 척 살아갈 수 없는 마음일까. 그래서 누군가 잘 자고 있는지, 이불은 덮고 자는지 그들의 방문을 조심히 열어보는 마음으로 글을 쓰는 것일까. 자신도 불면의 밤을 보내며 지은 이불 같은 글들이 누군가의 아침에 살아갈 힘이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런 마음이 작가의 마음이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