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대여섯 살 무렵, 창문도 없고 조도가 낮았던 아빠의 서재 한 켠에는 사진을 현상할 수 있는 암실이 있었다. 어둡지만 붉은빛이 새어 나오는 그곳에 아빠는 들어오지 말라고 하셨던 기억이 어렴풋하다. 대신 나는 바깥에서 검은색 가죽 커버가 씌워져 있던 아빠의 수동 필름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놀았다.
찰칵찰칵-. 은색 버튼을 누르면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유달리 커서 사진 찍는 기분이 났다. 나는 필름도 없는 묵직한 카메라를 들고는 깔깔대면서 사진 찍는 흉내를 냈다. 그 고가의 카메라가 얼마인지도 모른 채. 카메라와 함께 또 한 가지 장난감은 못쓰게 된 갈색빛 필름들이었다. 길고 긴 셀로판 필름을 머리카락처럼 늘어뜨리거나 온 몸에 옷처럼 칭칭 감고 놀면서도, 이게 어떻게 사진이 되는 건지 마냥 신기했다.
한쪽 벽에는 A4 종이 크기 정도의 흑백 사진이 한 장 걸려있었다. 아빠가 찍고 직접 인화하신 것이었다. 사진 속 주인공은 언니였다. 풀밭 사이에서 꽃과 나비가 달린 원피스를 입고 있던 언니는 예뻤다. 원래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얼굴이지만 흑백 사진 특유의 아련함과 부드러움이 더해져서인지 그 모습이 귀공녀 같았다.
그 시절 사진들을 지금 보면 무표정한 얼굴에 정적인 앞모습 사진이 대부분이다. 결혼식 단체 사진 같은 것을 보면 카메라 앞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표정이 얼어있다. 하지만 아빠의 흑백 사진은 어린아이의 자연스러운 옆모습을 타이트하게 잡은 인물 사진이었다.
훗날 나는 그 사진을 볼 때마다 미궁 속으로 빠졌다. 왜, 언니만 저런 독사진이 있는 거지? 나랑 동생 사진은 어째서 없는 거야? (당시엔 막내 남동생이 태어나기 전이었다.) 가족 앨범을 펼치면 4*6 사이즈보다도 작은 크기의 평범한 사진들 안에만 내 얼굴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 그 사실은 미스터리였다.
초등학교 3, 4학년 즈음이었던 것 같다. 아빠는 드디어 나를 주인공으로 독사진을 찍어주셨다. 여동생이 주말에 야외로 그림 대회를 나간 날이었다. 장소는 당시의 집 근처였던 행주산성. 권율 장군 동상 앞에서 동생이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동안, 아빠는 할 일없이 따라온 나를 사진 찍어 주셨다. 화창한 봄이었고 개나리와 진달래가 행주산성 언덕 아래로 흐드러져있었다. 아빠는 사진작가처럼 내게 포즈를 요구하셨다.
"개나리 뒤에 서서 양 손을 뒤로 해봐."
찰칵찰칵-. 셔터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저 언덕 위로 올라가 봐. 아빠가 손짓하면 천천히 달려내려 오는 거야."
아빠는 내가 언덕 아래로 내려오는 모습을 카메라로 담으려고 하셨다. 걷는 것과 뛰는 것 사이쯤, 동요 한 곡 흥얼거릴 만큼 기분이 좋아야 나오는 그 발동작이 막상 카메라 앞에서는 쉽게 나오지 않았다.
속으로 누가 볼까 봐 부끄러웠다. 머리는 말총머리로 질끈 묶고, 투박한 바람막이 잠바에 주황색 쫄바지 차림이 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예뻐 보이지 않아 민망한데, 아빠는 꽤 긴 시간을 그렇게 사진 촬영에 열을 올리셨다. 인화된 사진 속의 나는 지금 생각해보면 촌스럽기 그지없는 포즈를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 수십 년이 지나도 누가 찍어주었는지 단박에 알 수 있을 만큼 특별한 포즈였다.
아빠의 검은색 수동 카메라는 해가 지날수록 책장 한편에 머물러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2000년대를 지나면서 모두 대학생이 된 우리 자매들은 DSLR 같은 디지털카메라나 여행 감성을 오롯이 뿜어내던 로모 카메라 같은 것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나도 대학생이 되어 사진 수업을 들었다. 어릴 적에 품었던 사진에 대한 호기심을 풀 수 있는 기회였다. 골동품이 되어가던 아빠의 카메라는 나로 인해 다시 전성기를 맞이했다. 복수 전공으로 선택한 학과에선 사진 제작 수업이 있었고, 일부러 수동 카메라 촬영법을 배우는 교양 수업을 찾아 듣기도 했다. 두 수업 모두 학기 내내 실기 수업으로만 진행되어 원 없이 사진을 찍어볼 수 있었다.
조리개와 셔터스피드를 하나하나 조절해가며 사진을 찍는 일은 재밌었지만 정확한 결과물을 얻는 게 쉽지는 않았다. 사진을 현상하기 위해 필름을 맡기고 찾는 일도 번거롭고 귀찮았다. 전공 수업에선 근처 현상소에서 일반 필름을 인화하면 끝이었지만 교양 수업에선 발표를 위해 충무로에 있는 전문 현상소까지 찾아다녀야 했다. 그제야 수동 카메라로 사진을 찍고 인화하는 작업이 얼마나 어렵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인지 알게 되었다. 어린 눈에 대문짝만 하게 보였던 언니의 흑백 사진이 왜 언니로만 끝났는지 나름의 수고를 경험하며 깨달았던 것이다.
내후년이면 칠순을 맞이하시는 아빠는 젊은 시절과 달리, 사진 찍는 것엔 요즘 전혀 관심이 없으시다. 친정집에 머물거나 함께 나들이를 가면 넷이나 되는 손주들 사진은 찍어주실 법도 한데. 여태껏 한 번도 휴대폰으로도 사진 찍으시는 걸 본 적이 없다. 손주들 재롱을 그저 흐뭇하게 바라보시거나, 하얀 이를 드러내시며 크게 웃으시기만 한다.
"진짜 좋은 건 마음에 담는 거죠."
꽤 오래전, 친척들이 함께 모인 자리에서 누군가 이 순간을 사진으로 좀 찍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이야기하자 아빠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마 휴대폰 카메라가 보편화되지 않았을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때 난 속으로, 아빠가 사진 찍는 걸 진짜 귀찮아하시는구나 싶어 피식 웃음이 났다. 진짜 좋은 것이 무엇인지, 마음에 담는다는 것은 또 어떻게 하는 것인지 아빠의 말도 아리송하게 들렸다.
결혼기념일 즈음, 짧은 여행을 다녀왔다. 첩첩이 둘러싸인 산들이 늘 비슷한 것만 보던 내 시선을 빼앗았다.
얘들아, 저기 산 좀 봐봐. 진짜 멋있지? 하지만 아이들에게 아무리 말을 해봤자 무반응 일색이었다. 하긴 나도 어릴 적 어른들이 주변 경치를 보시며 "산 좋고~ 물 좋~다!" 하시면 그게 뭐가 그리 좋다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 정적인 자연 풍경들은 영 재미없고 시시하다고 생각하곤 했다.
어릴수록 가까이 있는 것이 좋고 나이가 들어갈수록 멀리 있는 풍경이 좋아지나 보다. 카메라를 꺼내 이곳저곳 풍경을 담았다. 좋은 사진을 건져보려고 나도 몇 해 전 미러리스 카메라와 렌즈까지 따로 구입했다. 하지만 막상 여행길에 나설 땐 다른 짐에 밀려 책장 한편을 벗어나지 못했던 카메라였다. 다행히 이번엔 챙겨 나왔다. 그런데 저 멀리 우릴 둘러싸고 있는 산들을 이 작은 카메라로 담는다는 것이 뭔가 소용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눈앞에 마주하고 있는 이 생동감 넘치는 풍경을 내가 안간힘을 쓴다한들 어찌 그대로 옮겨 담는단 말인가. 차라리 작고 작은 우리가 깊고 깊은 자연의 항아리 속에 포옥 담겨있는 게 어울렸다.
멀리 있는 풍경은 그만두고 아이들 모습이라도 사진으로 담고 싶었다. 하지만 아이들도 사진 때문에 자꾸 이런저런 포즈를 요구하는 내가 달갑지 않은 눈치였다. 큰 아이는 독사진을 찍어주려고 하면 일부러 마스크로 눈을 가리거나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린 날 아빠의 사진 포즈 요구에 민망해했던 내 모습이 큰 아이와 겹쳐 보였다. 작은 아이는 풀 숲에 숨어있는 메뚜기와 베짱이를 찾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고.
습관적으로 분주하게 사진 찍던 손을 내려놓아 본다. 저 멀리 산을 휘감고 도는 하얀 안개를, 머리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을, 눈앞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아이들 모습을 대신 천천히 담아 본다. 어디에 담나. 진짜 좋은 건 마음에 담는 거지.
마음이라는 그릇 안에 눈앞의 풍경을 담으려고 집중해본다. 정확히는 눈으로 바라보며 느끼는 기분과 감정을 마음속에 담는 것이겠다. 일상을 살다가 지치게 되는 순간이 있다. 그때 슬며시 마음 그릇을 기울이면 이렇게 담아 둔 좋은 기분과 감정들이 맑은 물처럼 다시 흘러나오지 않을까. 그 맑은 감정의 물 위에서 다시 힘차게 찰방대는 순간을 고대하며. 그저 바라보고 마음 그릇에 담는 연습도 한 번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