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날달걀을 옮기는 마음으로

by 혜일


달걀 한 판을 냉장고 속으로 옮기던 중이었다. 손에 쥔 달걀 하나를 그만 놓쳐버렸다. 허공으로 떨어진 달걀은 부엌 베란다 바닥으로 순식간에 곤두박질쳤다. 타닥-. 달걀 깨지는 소리가 났다. 이크. 달걀 프라이 하나가 날아갔네! 산산이 부서진 껍질 사이로 흐물흐물한 달걀흰자와 노른자가 제멋대로 퍼졌다. 미끌미끌해진 베란다 바닥을 한참 닦았다. 내 재주로는 달리 손 쓸 수 없어 버려야 했다. 아깝기도 했고 그 뒤처리도 곤란했다. 무엇보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뭐가 급해서 그렇게 달걀을 빨리 옮긴 거야?'라고.



낮에 마트에서 달걀과 함께 토마토, 대파, 아이들 간식거리 등을 샀다. 계산을 마치자마자 나는 물건들을 장바구니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천천히 담으세요!"


계산을 해주신 아주머니가 내게 속삭이듯 말을 건네셨다. 순간 멈칫했다. 계산대 뒤로 줄이 밀려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이 생소하게 들렸다. 마트는 보통 바쁘게 돌아간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 역시 구매한 물건은 습관적으로 장바구니 속에 빨리 쑤셔 넣곤 했다.



아주머니의 말씀 한 마디에 기분 좋게 마트를 빠져 나왔다. '천천히'라는 단어에 내 마음은 분명 푸근해졌던 것이다. 천천히. 사실 오랜만에 듣는 단어였다. 내 주변의 세계와 그 속의 나는 뭐든 빠르게 도착하는 것을 은연중에 선호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빨리 배우고, 빨리 얻고, 빨리 이루기를 아이들에게도 그리고 나 자신에게도 압박하고 있었으니까.





아침부터 밤까지 나는, 시계를 가장 많이 보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엄마인 나는 아직까지 시계를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아이들의 시간도 함께 챙겨야 한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나의 시간도 놓치지 않으려 애쓴다. 그러다 보니 요즘의 나는 시간과 달리기 경주를 하듯 살고 있었다. 정해놓은 시간에 시침과 분침이 도달하기 전, 어떤 일들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강박. 그런 급한 마음들이 천천히 걸어도 될 길을 빨리 뛰라고 미혹한다. 천천히, 조금씩 나아지기를 바라기보다 빨리, 한꺼번에 나아가기를 바랐다.



냉장고 속으로, 어디 달걀 한 판을 단숨에 옮겨 담을 수 있던가. 달걀 하나가 깨졌을 때, 삶의 모든 일에 급해져 있던 나 자신도 깨달았다. 달걀 요리는 스피드가 생명 일지 몰라도 날달걀 자체를 냉장고 속에 안착시키는 일은 오히려 속도를 줄여야 했다. 동그란 달걀을 너무 세게 쥐거나 헐겁게 쥐지 않도록, 이미 놓인 달걀과 부딪히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는 일은 천천히 해야 맞다. 하지만 달걀을 옮기며 본격적으로 저녁 준비할 일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마음이 급해진 것이다.



나는 다시 나머지 달걀을 옮겼다. 이미 하나를 깨뜨렸기 때문에 그저 옮기는 일에 몰두하며 천천히. 달걀 한 판, 삼십 개가 생의 한 달을 세어 놓은 것처럼 보였다. 그저 날달걀 한 개 같은 하루를 쥐고서 두려움 반, 기대 반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천천히 해도 될 일은 천천히 하자. 한 번에 하나씩, 날달걀을 옮기는 마음으로. 성급한 마음은 결국 어떤 요리도 완성시킬 수 없는, '깨진 달걀'로 남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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