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다

고백받은 나무

by 혜일


이른 아침부터 부지런히 움직여 도서관을 찾았다. 해야 할 일은 많은 데 집에서는 도무지 집중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오전 10시도 채 안되었지만 도서관 자료실 대부분의 자리는 이미 꽉 차있었다. 다행히 양 옆 사람들과 적당히 떨어져 있는 빈자리를 찾았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회전의자를 뒤로 빼고 앉았다.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을 걸으며 나는 호기롭게도, 글 한 편 정도는 완성하고 나오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나는 책상에 앉은 지 1분도 채 안되어 슬그머니 다시 일어섰다. 막상 자리에 앉자마자 그런 마음이 사그라들고 만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공부하는 이들, 색색의 볼펜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문제집을 풀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적막하고 고요한 열기가 도서관 안에 가득했다. 그 틈에서 나는 다다다다, 소리를 내며 노트북 자판을 두들길 용기가 나지 않았을뿐더러 이질감을 느꼈다. 취업과 각종 시험을 준비하던 예전에는 매일같이 드나들던 도서관이었는데. 그 길로 나는 도서관 부적응자가 되어 출입문을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자주 가던 카페를 갈까 고민하는데 청명한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그 많던 구름은 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작은 앙금마저 씻겨 내려간 마음이란 이런 풍경일까. 인생으로 살아가며 단 한 번이라도 이런 가을 하늘 같은 마음을 가져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날씨가 얼마나 맑은지 자른 손톱 모양의 달이 보석처럼 하늘 한가운데 박혀있었다.



도서관은 공원 안에 있었다. 가을 하늘에 취해 나는 그냥 걷기로 했다. 계획한 일정을 조금 미루더라도 가을을 누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집에서 챙겨 나온 텀블러 속 커피는 여전히 따뜻했다. 커피를 마시며 공원 길을 걸었다. 날씨는 쌀쌀했지만 햇살은 여름보다 한결 순하고 부드러웠다. 어린이집에서 나처럼 산책을 나온 아이들이 제 얼굴만 한 낙엽을 줍고 있었다. 노랑과 빨강, 밤빛으로 물든 나무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푸른, 키가 큰 나무들이 보였다. 그 모습이 서글프기도, 아름답기도 했다. 옛 시절에 여전히 추억과 미련을 품고 있는 사람 같아서.



가을은 완연한데 푸른 나무를 바라보니 자연스레 지난 계절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느 날, 가족들과 함께 밤 산책을 하던 중이었다. 새로 설치된 해먹 위에 우리 부부와 두 아이, 이렇게 네 사람이 나란히 누웠다. 주변이 어둑했지만 밤하늘보다 더 까만 나무들이 우리를 아늑하게 해 주었다. 그런데 얼마 뒤, 빗방울이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미처 챙겨 나오지 못해 우리는 서둘러 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할 수밖에 없었다.



"비 온다, 빨리 가자!"


굵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면서도 움직임이 없는 작은 아이에게 나는 외쳤다. 그런데도 아이는 나무 기둥 옆에 찰싹 붙어 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게다가 기둥에 입을 가까이 대고는 뭐라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아이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바삐 오가더니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나무한테 뭐라고 한 거야?"

총총총, 어느새 뒤를 따라온 아이에게 넌지시 물었다.



"멋져!"

"진짜로?"

"응. 나무야, 멋져라고 말해줬어. 나무가 움직일 수 없으니까 내가 뛰어다니면서 말해준 거야."


아이는 모든 나무에게 "멋져!"라고 말해주고 싶은데 너무 많아서 그럴 수 없다고 아쉬워했다. 밤의 나무들에게 직접 고백한 것이다. 나무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그렇게 단순한 표현으로. 아이의 엉뚱한 말과 행동에 웃음이 나오면서도 금세 수긍이 갔다. 그래, 나무는 정말 멋진 존재인데. 그 사실을 너보다 엄마가 더 잘 아는데. 엄마는 한 번도 그런 말을 나무에게 전해준 적이 없네.


그 여름밤, 아이의 고백을 받아서일까. 어느새 단풍으로 물든 나무들은 올 가을, 유달리 아름다워 보인다. 사실, 나무는 단풍이 들 즈음 성장을 멈춘다고 한다. 겨울을 준비하며 잎을 떨구어내기 위해 제 스스로 수분과 영양분을 가지 끝까지 전달하지 않는다고. 잎이 초록색으로 보이는 엽록소가 파괴되는 대신, 그동안 드러나 보이지 않던 색소들이 노랗고 붉게 제 빛을 발하는 것이라고. 그러고 보면 나무에게 있어서 마지막 계절은 이토록 단풍빛으로 충만한 가을이 아닐까. 다시 빈 가지가 되는 겨울은 나무가 새 삶을 시작하는 계절이고.



단풍 세리머니라고 해야 할까. 마른 나뭇잎 비가 공원 길 위로 쏟아져내린다. 계획대로 하지 못한 일들이 많다고 마음을 졸이다가도 이런 순간에는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멋져, 멋지네요! 나무도, 하늘도, 가을도.

그리고 이 계절 한가운데 서 있는 나와 당신의 삶도요."



나무의 아름다운 피날레를 바라보며 나도 아이처럼 고백하는 계절을 보내야겠다고 다짐한다. 누군가의 얼굴과 마음을 발그레하게 물들여주는,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고백의 말들을.



이전 13화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