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의 푸른빛

책읽기는 싫지만 글은 쓸수밖에 없는 이유

by serein

딱히 많이 슬픈 날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하게, 그지없이 아무렇지 않은 하루였다.


그냥 서글펐고,

내 마음은 창문이 열린 것처럼,

사람의 온기 하나 없이 바람만 스치는 교실 같았다.


책상에 엎드려 교과서의 빈 공간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차가워진 펜 끝을 느끼며 그 여백에 써보았다.


‘답답하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그 밑으로 나는 한참을 써 내려갔다.

펜은 결국 심이 다 닳았고,

내 손의 온기를 품은 채

기울어지듯,

옆으로 조용히 쓰러졌다.


차가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옆구리엔 따뜻한 햇빛이 닿아 있었다.


생각해보면,

매일이 그런 흐린 날들이었다.

이유 없는 우울 속에 시달리던 날들.


그리고 그 날,

내 안의 글이 조용히 깨어났다.


나는 말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을

노래 가사처럼, 시처럼,

막 쏟아내듯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책을 집어 든 기억은 거의 없지만

펜과는 자주 마주 앉아 있었다.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들이

글로는 조금씩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글들이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글들 하나하나가

우울, 공허, 슬픔이라는 푸른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결국 그 뿌리는 나였고,

글은 점점 나를 닮아가고 있었다.


어느새 나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글에게 만들어지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우울한 문장이 나를 대표하기 시작했고,

나는 점점 더 그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극 수업’이라는 낯선 상황 속에서

글이 아닌 목소리로 나를 표현하게 되자,

내 안의 책장들이 조각조각 바다에 흩어지듯 무너졌다.


그렇게 목소리의 표현이라는 새로운 세계에 빠져들었다.


목소리는 대화라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감정이 썩어 가는 것이 아니라,

정리되고 사라지는 감각.


그건 새로웠고,

무엇보다 나를 긍정적으로 만들어주는 힘이 되었다.


그러면서 푸른빛으로 가득하던 세상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채로운 색들과 따뜻한 온기.

그 밝아지는 내 모습이 어색하기도 했고,

때론 가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그 밝은 내면을 파고들며

푸른 뿌리를 찾고,

그 자리를 지키려 애썼다.


그렇게 해야만

마음이 편안해졌다.


조금만 나가면

내가 만든 세상의 빛과 온기가 기다리고 있음에도,

나는 눈을 감고 귀를 닫고

차가운 뿌리의 촉감에만 집중했다.


그렇게,

그렇게, 내 안의 세상은 둘로 나뉘었다.


이젠 특별히 슬픈 날이 아니더라도

나는 문득

푸른 뿌리와 닮은 해변으로 혼자 떠나

바다 소리와 함께 글 속에서

한참을 울곤 했다.


그 글들의 조각이

하나둘 흩어져

푸른 바닷속에 뿌려졌다.


그 풍경을 바라보며

나의 모든 세포 하나하나도

그 속에서 흩어져

자유를 얻길 바랐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푸르게 물들어가는 나 자신이

너무 싫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 속에서 용기를 얻어

살아가는 나를 발견했다.


그래서, 글은

이제 나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내 주변 사람들은

아마 내 안에 이런 그늘이 있다는 걸 모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우울의 늪에 스스로 찾아가

그 속에 몸을 맡긴다.


그래야만

밝게 살아갈 힘이 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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