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기둥이 있어야 곁을 내어줄 수 있다.
고무나무 화분을 샀다.
사람을 포함해 동물이든 식물이든
무언가를 키우는 일이 어렵기만 한 나로서는
여전히 겁이 났지만, 나무를 보는 순간 웬일인지 마음이 움직였다.
기둥은 제법 단단해 보였고,
잎들은 고요한 윤기를 내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나무 기둥 옆에
품종이 다른 작은 식물이 함께 심겨 있었다.
좁은 공간에 어색하지 않게 공존하는 모습이 마음에 와 닿았다.
화원에서는 장식으로 심었을 뿐이겠지만,
나는 그 모습에서 ‘배려’를 읽었다.
제 몸을 지탱하는 중심이 튼튼하기에
자신의 공간을 조금 내어줄 수 있었던 건 아닐까.
언제부터인가 나는 불편한 상황에서까지
상대를 헤아리고 싶지 않게 되었다.
나를 지키지 않은 채 남을 먼저 돌보다가,
결국 너덜해진 채로 지쳐버린 나를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다.
몇 년간 다문화 여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던 시간이 그랬다.
그 시간은 분명 의미 있었고,
나만의 정체성을 세우는 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봉사가 늘 선한 감정으로만 남지는 않음을 느꼈다.
반복되는 호의가 어느 순간 당연함이라는 권리로 변할 때마다,
내 마음은 조금씩 닳아갔다.
배려란, 나를 지탱하는 최소한의 힘이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을 그때 절감했다.
그렇게 마음을 닫고 지내다 휴대폰 갤러리를 넘기던 중,
오래된 사진 한 장 앞에서 시선이 멈췄다.
한국어 수업 시절, 문화체험을 하며 그녀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 우리는 스스럼없이 어깨를 맞대고, 활짝 웃고 있었다.
평소에는 ‘다르다’는 생각이 앞서 쉽게 섞이지 못했는데,
그날만큼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언어가 없어도 눈빛만으로 충분했다.
소통은 반드시 문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 사진은 말해주는 듯했다.
사람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결국
각자가 만든 완고한 틀일지도 모른다.
상처받지 않으려 세운 그 틀은
살아갈수록 더 단단해지고, 점점 더 조심스러워진다.
물론 혼자 있는 시간은 여전히 필요하고 소중하다.
그 정적인 시간 안에서 나를 회복하고 중심을 세운다.
그 시간들이 있기에 다시 누군가와 마주할 때, 온기를 내어줄 수 있다.
고무나무처럼 나의 기둥이 무너지지 않는 선 안에서,
배려와 소통의 적절한 거리를 가늠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