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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언니 Mar 25. 2021

당신을 정의할 수 있는 키워드는 무엇입니까?(2)

08. 키워드

 (전편에 이어) 십 년이 넘도록 고민했지만 속 시원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던, 그래서 늘 마음 한 구석을 찜찜하게 했던 "당신을 정의할 수 있는, 혹은 빗대어 표현할 수 있는 사물은?"에 대한 답을 마침내 찾았다.


하나, 생존자(survivor)


 나는 서바이버. 즉, 생존자다. 나를 생존자라 칭하는 것은 단순히 작년에 위암 수술을 했고, 비교적 초기에 발견했기 때문에 수술 후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사실만을 대변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돌이켜보면 세상에 태어난 후부터 30대 중반이 된 현재까지, 살아남기 위한 나름대로의 긴 투쟁의 시간들을 보낸 것 같다. 그리고 여전히 끝나지 않았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그리고 다가올 미래에도 나는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 중일 것이다.


 예전에는 살아남기만 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고 생각했다. 생존자가 아니라 승자(winner)이고 싶었다. 노력과 운대가 맞아 찰나의 영광을 맛보기도 했지만 투쟁은 끝이 없었다. 이거 다음은 이거, 이거 다음은 저거. 저거 다음은 또 다른 그 무언가. '어디 내놓아도 빠지지 않는 학교, 직업, 배우자, 집, 자녀 그리고 사회적 지위와 주어진 역할들, 각 역할에 따른 책임과 도리'까지. 규격화된 만렙 기준도 없고 죽기 전에는 끝도 안나는 싸움들에서 가족, 제삼자 그리고 스스로가 나를 옭아맸다.


 수술 직전 엄마에게 '사는 것이 지옥 같다'라고 말했다. '끝도 없는 형벌을 받는 것 같다'고도 말했던 것 같다. 혹시라도 변수가 생겨 수술 중에 내 신상에 변고가 생기더라도, 나는 그만 되었다고(enough). 어차피 산다고 해도 더 비루한 육체로 또 싸움터로 돌아가 인생 서바이벌 필드에 복귀하는 것이 버거웠다. 간절히 살아남아야 하는 이유만큼이나, 특별히 이쯤에서 생을 마감해도 아쉬울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다.


 기억도 희미한 어떤 미드에서 원시부족들이 전사하면 동족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 "너의 싸움은 이제 끝났다. 편히 쉬어라"라고 말하는 장면을 늘 마음 한편에 품고 살았다. 예상보다 빨리 나도 나의 싸움을 끝내게 될지라도, 그러면 드디어 나를 옭아매던 모든 것들에서 훌훌 벗어나 비로소 편히 쉴 수 있을 것이라 생각에 편안했다. 그러나 나는 눈을 떴고, 살아남았다.  


 매일 아침에 눈을 뜬다. 그러니 살아보려 몸을 움직인다. 나의 오늘이 누군가는 그토록 간절한 바랬던 어제라서? 아니다. 살아남았으니까, 생존자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다. 과거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생존자로서 본분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뿐이다. 싸우고, 또 싸우고, 생존자로 버티다보면 언젠가 내게 할당된 시간이 끝나겠지. 그저 Not today. 오늘이 아닐 뿐. 그러니 나는 어제와, 오늘도, 내일도 서바이버(survivor)다.


 둘, 멋쟁이


 첫 번째 키워드가 너무 무거워 두번째로 뽑은 키워드는 어쩌면 좀 웃기다고 생각될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이다. 나는 늘 한결같이 그놈의 '멋'을 추구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딱히 타인의 '멋'에는 관심이 없다는 점이다. 최신 트렌드니, 신규 컬렉션이니 그런 것들에는 그다지 흥미가 없다. 유행과는 무관하게 본인만의 심미안과 바디 스펙을 기준으로 '멋'을 추구한다.


 어릴 때부터 그토록 옷과 장신구에 사죽을 못썼던 것도, 어쩌면 이런 연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러다 보니 대학 전공을 의류학을 선택했으나 수많은 삽질을 통해 결국 나의 관심사는 '패션을 좋아하는,  부리는 것을 좋아하는 '였지 '패션 트렌드를 만들거나 조사하는 , 직접 의복을 디자인하고 만드는 , 혹은 남을 스타일링해주는 ' 아니었음을 알게 됐다. 나는 패션계의 소비자로서 향유자가 되고 싶은 이지, 공급자나 창작자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다.

 

 남들에게 잘 보이거나 무언가를 뽐내고 싶어 '멋'내는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나만의 만족감으로 '멋'부리는 것이 좋을 뿐이다. 그러니 내 기준에서는 '멋있는 착장'인데 다른 사람이 봤을 때는 '잉?' 스러운 복장으로 등장해 상대방이 난색을 표한 경우도 심심치 않았다. 다른 사람이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다.'멋'의 영역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my way였고 앞으로도 나는 변함없이 '멋쟁이'의 길을 갈 것이다.   




 여기까지가 나를 정의하고 대변할 수 있는 키워드들이다. 한국인의 특성상 왠지 하나를 더 찾아 3개를 뽑아줘야 할 것 같은데, 나머지 하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언젠가 시간이 또 지나면 불현듯 또 '빡!' 떠오르지 않을까?


 그때까지는 일단, '멋쟁이 생존자'인 것으로.


 앞으로 누가 나에 대해 물어본다면, 나는 당당하게 "안녕하세요, 멋쟁이 생존자 OOO입니다."라고 대답하기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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