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 매달려 논문 쓰기 4
논문 작업을 하면서 틈틈이 브런치에 글도 쓰려고 했는데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니 예상과 달리 도저히 짬이 나질 않았다.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뒷정리를 하면 오후 8시, 방전 타임이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을 보며 잠시 쉬다 보면 어느새 1~2시간이 훌쩍 지나가 있다. 그제야 무거운 엉덩이를 옮겨 컴퓨터 전원을 켰던 날은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도저히 컨디션이 안 좋은 날은 그대로 곧장 곯아떨어졌다.
그리고 지난주, 드디어 석사논문을 제출했다. 그러나 뒤이은 연구 심사에서 ‘조건부 합격’ 피드백을 받았고, 추가 수정 작업이 남겨졌다. 수정본을 제출한다고 해도 할 일은 남아있다. 지도 교수님의 최종 확인 후, 인준지에 서명도 받아야 하고 인쇄소에서 제본 작업을 하고 학과 사무실에 하드카피본을 제출해야 진짜 끝이다.
아직 완벽히 작업을 끝맺지도 못했으면서 급하게 타자기를 두드리는 이유는 1차 제출본을 탈고하며 깨달은 것들을 기록으로 남겨 두고 싶기 때문이다. 석사 논문의 주제는 전 직장에서 내가 수행했던 일에 대한 것이다. Content-driven Commerce라는 분야를 주제로 해당 개념의 등장과 발전 방향을 살펴보고 사업 모델 분석과 성공 요소를 도출해보는 질적 연구다.
통상 줄여서 '콘텐츠 커머스'라고도 부르는 이 분야를 논문의 주제로 정한 이유는 특별히 이 분야에 관심이 많거나 조예가 깊어서라기보다, 솔직히 '내가 그동안 했던 일이니까, 좀 쉽게 갈 수 있지 않을까?'라는 얄팍한 마음에서였다.
석사 논문을 맨 땅에 밑도 끝도 없이 헤딩하는 것보다 조금이나마 갖춰진 상태로 맞닿들이고 싶었던 얄팍한 수였다. 약아빠진 마음으로 과거에 했던 일을 논문 주제로 삼았던 일은 오히려 난생처음으로 감정을 분리하고 이성적으로 과거 행적을 살펴볼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 과정에서 내가 깨달은 점은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애초에 콘텐츠 커머스 사업 속성에 맞지 않는 사람이구나.”라는 점이었다. 그러자 ‘허허허’ 너털웃음이 났다. 팩트 폭력 당한 기분이랄까.
실무자가 아닌 연구자의 입장에서 냉정히 콘텐츠 커머스 사업들을 분석해보니 이 사업을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는 속성들은 내 본연의 성격이나 기질과 몹시 상반되는 점 투성이었다. 일례로 콘텐츠 커머스 사업은 매우 다양한 이해 관계자들이 복합적으로 얽힌 비즈니스이며, 맹점은 그들은 얼마나 잘 컨트롤하고 각각의 이해관계를 원만히 조율하는가에 있다. 특별히 고도화된 첨단 기술 같은 것들은 필요치 않다.
콘텐츠 커머스 사업 기획자는 오케스트라의 지휘자 역할과 참 닮았다. 각 파트의 선율이 아름답게 조화될 수 있도록 섬세하고 전체 흐름을 살펴야 하고 적절한 디렉션을 줘야 한다. 또 예민한 촉으로 불협화음이 발생하는 곳을 신속히 찾아 제거하거나, 애초부터 리스크가 아예 발생하지 않도록 ‘선수들의 상태’나 ‘주변 컨디션’을 미리 포착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결국 사람에 의한, 사람에 의해 굴러가는 일이다.
평소 ‘일은 혼자, 커피는 다 같이’라는 마인드로 회사를 다니는 나에게 콘텐츠 커머스 기획자의 일이 늘 버거웠다. 예민한 기질로 사람에 대한 스트레스와 외부 자극에 민감한 내게 당최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의 반복은 스트레스 임계치를 매번 새로 갱신하게 했다. 사업의 큰 그림보다는 각자의 욕심과 목적에 따라 아우성 거리는 판에서 혼자 중재자로서 던져진 느낌이었다. 혼자 조용히 컴퓨터로 일하는 것을 선호하는 나는 다양한 인간군상의 아사리판에서 인간에 대한 환멸, 끝물에는 농담 삼아 ‘동족 혐오증’에 걸리겠다고 주변에 하소연하고 다녔다.
회사 생활을 하면서 직장인들을 제일 미치고 팔딱 뛰게 만드는 상황은 본인에게 ‘책임과 의무’만 있지 정작 ‘권한’이 없을 때다. 말단 실무자인 나는 ‘콘텐츠’와 ‘커머스’와 관련된 사람들의 관계를 조율할 책임과 사업을 성공시킬 의무만 있었을 뿐,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단 칼에 묵살할 권한도 그 과정에 수반되는 감정적인 실랑이를 그만두게 할 권한도 없었다.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었다. 나는 롤러코스터를 타며 스릴을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 단단한 땅 위에서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것이 훨씬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려 6년이 넘도록 '콘텐츠 커머스' 사업과 관련된 일들을 하며 조직 내에서 스페셜 리스트로 인정받았다. 아주 가끔은 ‘잘한다’는 칭찬에 취해 ‘내가 이 일을 좋아하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서 가끔은 화려한 과거를 추억하는 은퇴한 톱가수처럼 옛날이 그리워질 때가 있었다. ‘콘텐츠 커머스’는 속된 말로 여전히 핫한 분야이며, 이후에도 어떤 방식으로든 각광받을 분야라는 점이 미련과 청승의 원천이었다. 정작 그 일이 내게 잘 맞고 적합했던 일이 아니라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 조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발목에 스스로 족쇄를 채웠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
지금은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지만 가끔 악마의 유혹처럼 같이 일했던 동료로부터, 혹은 헤드헌터로부터 연락이 온다. 그럴 때마다 마음이 조금씩, 아니 많이 출렁거릴 때가 많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동요할 것 같지 않다. 논문 작업을 끝맺음하며 나의 과거가 이성적으로 정리되는 것 같았다. 본능적으로 ‘맞지 않음’을 느끼고 있었지만 익숙함에 취해 애써 외면했던 진실들을 글로 적고 이성적으로 맞닥들인 경험, 그것이 이번 논문 작업에서 바로 내가 얻은 수확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