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에 매달려서 논문 쓰기 3
몇 년째 고요한 호수처럼 잔잔한 논문 작업에 가끔 외부에서 돌멩이가 날아와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때가 있다.
아니 취미로 글도 쓰고 책도 쓴다며, 그깟 석사 논문 하나 못써서 아직도 그러고 있어?
자존심에 생채기가 나서 곧바로 내 안에 깊-이 잠들어 있는 파이터 본능을 일깨워 '너나 잘하세요'라고 거침없이 응수하고 싶지만, 아직 완수하지 못한 논문 작업의 책임은 결국 내가 감당해야 하는 몫이므로 진정하고 한 발 물러선다. 또 부분적으로 빈약한 의지와 결단력은 스스로도 인정하는 바이므로 고양이 발톱 같은 날카로운 가시를 슬쩍 감춘다. 그러나 한 가지 명확히 짚고 넘어가고 싶은 점이 있다. 바로 나처럼 신변잡기적인 글쓰기를 사랑하는 '에이스트적 자질을 가진 사람들'에게 학문적인 글쓰기는 오히려 쥐약이라는 사실이다.
무릇 석사 논문이란 선행된 연구들을 바탕으로 학술적인 기술을 하는 작업이지 나 같은 쪼랩의 의견 따위를 써내는 작업이 아니다. 달리 말해 본인의 연구 주제에 대해 선행 연구와 실험을 통해 가설을 검증하며 답을 찾는 과정이지 단순히 느낀 점에 대해 서술하는 행위가 아니란 말이다.
특히 선행 연구 결과에 대해 감히 미생 따위인 내가! 판단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은 천부당만부당한 행위다. 그러나 잊을만하면 자꾸, 슬그머니 이놈의 개인적인 생각들이 야금야금 기어 나와 논문의 방향성을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려 버린다.
차라리 인문, 사회과학 계열이 아니라 이공 계열이었다면 좀 나았을까? 실험을 통한 검증 과정에 연구가 집중되어 있으니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논지를 사정없이 흔들어 버리는 지금 같은 상황에 덜 고심스립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해 봤지만 그 또한 오산이다.
지인들을 살펴보면 실험의 설계, 수행, 분석하는 작업 역시 만만치 않을뿐더러 얼마든지 연구자의 주관이 사정없이 각 단계에 끼어들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에세이스트적 자질을 가진 이공계열 학생은 더 깊은 미궁 속에서 헤매게 만들지 않았을까?
다시 돌아가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그 취향에 따라 스타일링이 천차만별이듯이, 소위 글 좀 쓴다든 사람들에게도 글쓰기 취향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니 다 같은 글쓰기로 싸잡아 치부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거듭 강조하고 싶다. 참고로 나는 함축된 의미를 강렬하게 전달해야 하는 카피라이팅, 그리고 시 쓰기도 잼뱅이다. 오죽하면 맨날 제목이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길어지냔 말이다.
매일 꾸준히 작업은 한다고 하는데 영 진척도가 지지부진하여 온 몸이 '나 지금 스트레스받고 있어. 너 지금 조심해! 이러다 나 또 사고 친다!'라고 강렬하게 외쳐대고 있다. 30년이 넘도록 단 한 번도 나지 않았던 눈 다래끼가 나질 않나, 지루성 두피는 프리미엄 민감성용 샴푸에도 무반응으로 일관하며 미치도록 예민한 상태다. 목과 어깨는 진작이 아작이 났으며, 작고 예민한 위는 고요한 새벽까지 꾸르르륵 꾸르르륵 존재감을 뿜 뿜! 뿜어내며 숙면을 방해하고 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콧바람이라도 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코시국으로 어디 바람 쐬러 다니기도 마땅치도 않다. 유일한 낙이었던 스타일링의 기쁨은 장기 재택근무로 개시도 못한 봄옷들을 옷장에 차곡차곡 쌓고 있다. 이러다 spring은 건너뛰고 summer로 훅 넘어갈까 봐 전전긍긍한 와중에 분리수거, 음식물 쓰레기 버리러 갈 때에 동네 최고 멋쟁이로 등극할 지경이다.
활동 반경을 조금 넓히고 산보 겸 운동을 한다는 핑계로 요즘 출근 도장을 찍는 곳은 동네 대형 서점이다. 정확히는 서점 한 구석에 문구 코너에서 소싯적 문구 덕후였던 기질을 발휘해 각종 펜시 용품들을 탐닉 중이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자는 신년 각오가 무색하게 각종 볼펜과 포스트잇, 형광펜, 공책과 심지어 '사두면 언젠가 다 쓸모가 있을' 각종 카드들까지 야금야금, 한가득 사모으고 있다. 지난주에는 한 눈에도 유아용인 것 같은 스티커 기계에 돈을 짚어 넣고 찬란한 이름 석자 고이 새겨진 디즈니 캐릭터 네임 스티커까지 만들어 올 뻔했다.
각양각색의 문구류를 살펴보며 시간을 보내다 보니 문득 몇 년 전 추억이 하나 떠올랐다. 빈번한 조직개편으로 소속 팀이 계속 변해 한창 스트레스를 받고 있을 때였는데, 함께 방황하던 후배가 문득 비밀 장소를 알려준다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둘이 몰래 회사를 빠져나와 같이 향한 곳은 회사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한 눈에도 연식이 꽤 오래된 것 같은 허름한 문구점이었다. 들어가 보니 나미와 잡화점 저리 가라 각종 장난감들이 오밀조밀 각 통로별로 발 디딜 틈 없이 진열되어 있었다.
아주 어릴 때, 초등학교가 무려 국민학교 시절에 가지고 놀았을 법한 각종 딱지와 아기자기한 완구류들이었다. 가격은 얼마 하지 않는 조악한 물건들이었는데 후배는 자기는 스트레스를 받으면 여기 와서 이것들을 사서 조립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회사로 복귀했다고 했다. 반짝이는 눈동자로 이것저것 살펴보며 내게도 하나 고르라고 했다. 아이구야, 이름만 들어도 입이 쩍 벌어질 해외 유수의 대학을 나온 엘리트 재원이 고작 몇 천 원짜리 딱지와 레고를 조립하며 스트레스를 풀게 만든 이놈의 조직과 윗사람들의 작태에 한숨이 절로 나는 동시에 이런 귀엽고 깜찍한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있었던 후배가 너무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 한 번 골라보자.
시간이 꽤 지나 그때 내가 무엇을 골랐는지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작은 피규어 같은 것을 조립하는 완구였던 것 같은데 조립한 완성물의 행방은 당연히 묘연하다. 퇴사하며 자리 정리하는데 업무 서랍장에서 조잘조잘한 문구류들이 끝도 없이 나왔던 것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독처럼 쌓인 스트레스를 조금씩 해소했나 보다. 정해진 데드라인은 선명한데 생각보다 진척이 더뎌 받는 스트레스도, 아카데믹하게 논리 정연한 글을 쓰고 싶은데 쉴 새 없이 흘러나와는 연구 방향성을 흔들어 버리는 베이비 수필가의 스트레스도, 모두 모아 형형색색의 볼펜 사이로 흘려보내고 있는 요즘이다.
문득 나와 같이, 잘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고작 석사 논문 따위에' 전전긍긍하고 있는 이 땅의 수많은 예비 석사생들 그리고 한 술 더 떠 방랑가처럼 글을 쓰는 천상 에세이스트들은 이 인고의 시간을 어떻게 버티며 스트레스를 풀고 있는지 궁금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