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은 기차를 타고, 기차는 꿈을 싣고
내 기억 속에서 숨 쉬는 최초의 기차여행은 다섯 살 무렵 아버지와 함께 서울에서 아버지의 고향인 울진 갈 때 기차를 탄 일이다. 울진에 기차역이 없기 때문에 아마도 대구나 그 부근까지 기차를 타고 이동한 다음 버스로 갈아타고 (그때만 해도 오지인) 울진으로 들어갔을 것이다. 오십 년 전의 이 여행은 내 인생 최초의 여행이기도 했다.
기차가 어두운 터널을 통과할 때마다 무서웠던 기억이 나는데 그때 아버진 당신의 손으로 사슴처럼 겁먹은 유년의 눈을 가려주시곤 했다.
기억 속에서 숨 쉬는 두 번째 기차여행은 고등학교 때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완행열차를 타고 가평 대성리까지 수련회를 떠났을 때다. 40킬로 남짓한 길지 않은 노선이지만 그땐 왜 그렇게 원거리 여행으로만 느껴졌는지.. 바람이 일자 한 친구가 쓰고 있던 교모가 창밖으로 날려간 일도 있었다. 소풍 갈 때처럼 사이다와 삶은 계란을 나눠 먹던 소년들에겐 그것도 큰일이었다.
보통의 여행은 목적지에 도착해서 시작되는데 기차를 타면 그 자체가 여행이다. 그래서 ‘기차여행’이라고 한다. 지금은 스토리 웨이라는 역내 편의점을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 전에는 철도청 납품 업체인 홍익회에서 열차에 카트를 끌고 다니며 삶은 계란이나 사이다 같은 각종 주전부리를 팔았다. 같은 계란이나 사이다라고 해도 기차 안에서 먹는 맛은 다르다. 그것이 여행의 미각이다.
이후 길이 좋아져 버스의 여객 분담율이 크게 증가하고 마이카 시대가 도래하면서 기차를 타고 여행할 일은 자주 생기지 않았다. 전국을 완전히 일일생활권으로 재편한 KTX를 타고 지방에 출장갈 일은 있었지만 비즈니스는 여행이 아니다.
'요즘 기차를 타고 여행을 다니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라고 물을 수도 있는 시대에 기차여행이라는 도발적(?) 제목이 붙은 신간이 나왔다.(괜찮아, 잘했어! 기차여행, 정정심著, 글로벌마인드) 책의 저자는 현직 풍기역 부역장이다. 그러니까 코레일 직원이 기차를 타고 전국의 40개 역과 그 주변을 여행한 기록이다.
그런데 책을 펼치면 이 여행기가 단순히 공간적 여행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저자의 인생 여정임을 알 수 있다.
부산을 시작으로 여수, 울산, 전주, 강릉, 목포, 태백, 추풍령, 양평, 경주 등 전국 40개 역을 무대로 일정한 방향성이 없이 여행이 이어지면서 저자의 마음 속에 숨어있던 추억과 인생 여정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민다.
"득량역에 도착하니 오후 6시 20분이다. 많은 기대를 하고 추억의 거리로 갔는데 평일 저녁이라 그런지 거리는 한산하다. (중략) 다행히 초등학교 교실로 꾸며진 곳의 문을 여니 키 작은 나무 의자들이 나를 반긴다. (중략) 맨 뒷자리에 앉아 칠판 쪽을 우두커니 바라보는데 1학년 때 담임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른다. 산수 시간에 나에게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오른쪽 팔을 매몰차게 두어 차례 때리셨다. (중략) 맞은 게 아파서 울었던 게 아니라 어린 마음에도 선생님의 말씀에 너무 자존심 상했고, 그 당시 반장이었던 남자 짝꿍한테 창피해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엊그제 일처럼 또렷하다."(본문 평범한 밥상, 비범한 맛 중에서)
"이른 아침이라 생각했건만 카페를 이용하는 손님들이 나 말고도 몇 명 더 있었다. 나는 농가 주부들이 직접 만들었다는 사과 쿠키와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카페 안에 있는 '파리의 심리학 카페'라는 책을 집어 든다. 사과 쿠키 한 조각과 아메리카노 한 잔, 그리고 책 한 권이 내 앞에 있으니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생각해보면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책 한 권 펼쳐 드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직장 다니며 가정주부로 살아가야 하는 '일상'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그런 시간을 만들기 어려웠다." (본문 "여그에 뭐 볼 것이 있다고?" 중에서)
개인적으로는 기차여행을 떠나지 않지만 여행자들의 입장은 참 닮았다. 난 주말에 자전거를 타고 산천을 주유하며 갈증이 나면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으로 목을 축이고 여행의 저녁에 이르러서는 소박한 시골 목욕탕에서 피로를 푸는 걸 인생의 즐거움으로 삼는다. 하지만 많은 돈도 들지 않는 이런 일상을 얻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건 인생의 아이러니다.
즐기는 여행도 다르고 사는 모습도 다르겠지만 이 책을 읽다 보면 직장인이자, 주부이자 두 아이의 엄마인 저자의 처지가 오버 랩 되면서 묘한 동질감이 묻어난다. 여행을 즐기든 그렇지 않든 직장과 가정사에 시달려야 하는 처지가 같은 분들이 이 책을 읽으면 아마도 많은 부분에서 공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꿈꾸던 기차여행을 하면서 이 책을 곁에 둘 수 있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 무엇을 타고 떠나든 또는 형편이 안 되어 방구석에서 베개를 가슴에 괴고 있더라도 이 책의 어느 한 장(章)이라도 펴본다면 저자의 발걸음을 따라다니며 몸과 마음이 힐링 되는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달리는 버스를 향해 손을 흔들지는 않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달리는 기차를 보고서는 손을 흔든다. 그 이유는 달리는 기차에는 누구나의 추억 그리고 꿈이 실려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추억을 찾고 꿈을 꾸고 싶다면 한번 떠나보자, 기차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