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그리고 1960년의 아버지와 지금의 아버지
소설가 이순원은 2018년, 자신의 베스트셀러 소설 <압구정동엔 비상구가 없다>를 25년 만에 새로 간행하면서 ‘작품을 처음 쓴 때로부터 25년이 지난 지금도 한국 천민자본주의는 무엇 하나 달라지지 않았다’고 일갈했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설 속 무대인 압구정동은 ‘똥통같이 왜곡된 한국 천민자본주의가 미덕처럼 내세우는 부패와 환락의 별칭적 대명사’다.
이순원은 소설이 처음 발간된 때로부터 사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압구정동으로 대변되는 한국의 천민자본주의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고 했지만 사실 자본의 속성은 욕망과 그에 이은 타락이며 따라서 자본주의는 25년이 아니라 60년이 흘러도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
때는 4.19가 발생하기 전인 1950년대 후반
보험회사 영업소의 계장인 로맨스 빠빠(김승호)는 아내(주증녀)와 함께 2남 3녀의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맏딸 음전(최은희)은 관상대(기상청) 공무원인 우택(김진규)과 얼마 전에 결혼을 했으며 큰아들 어진(남궁원)과 둘째 딸 곱단(도금봉)은 대학생, 둘째 아들 바른(신성일)과 막내 딸 이쁜(엄앵란)은 고등학생이다.
로맨스 빠빠란 겨우(?) 쉰둘의 아버지가 노망을 부린다고 해서 아이들이 붙인 별명이다. 만년 계장이라 일곱 식구를 부양하기에 봉급은 터무니없이 적지만 집안엔 웃음꽃이 지질 않는다. 로맨스 빠빠는 첫딸 음전의 결혼비용으로 인해 회사에 적잖은 빚이 있다.
130분이 넘는 제작 당시로서는 러닝 타임이 상당히 긴 ‘로맨스 빠빠’(1960, 감독 신상옥)는 상영시간의 대부분을 1950년대 당시 서울 소시민들의 삶을 묘사하는데 할애한다. 3부자 모두 심하게 낡은 구두를 신고 있지만 아버지의 수중엔 한 켤레의 구두를 살 돈밖에 없다. 대학생인 둘째 딸 곱단은 등산 바지가 없어 친구들과 하이킹을 떠나지 못한다. 아버진 아무 바지면 어떠냐며 자신이 입던 양복 바지를 딸에게 벗어 주지만 집으로 찾아온 친구들 앞에서 망신살이 뻗친 곱단은 울음을 터뜨린다.
특별한 긴장감 없이 진행되던 영화는 로맨스 빠빠가 실직하면서 결을 달리한다. 경영상의 이유로 본사에서 감원 방침이 정해지고 그 여파가 지점에 미쳐 쉰둘의 로맨스 빠빠가 후진들을 위해 퇴진하기로 한 것이다. 맏딸 혼사로 인한 빚이 있어 퇴직금조차 받지 못한 로맨스 빠빠는 자신의 낡은 시계를 팔아 생활비를 마련한다.
신상옥 감독이 ‘로맨스 빠빠’를 발표한 그해 4.19가 일어났으며 이듬해엔 5.16이 발생했다. 세월이 흘러 정권이 바뀌고 민주화가 되어 문민정부가 들어섰다.
그러다 1997년 우리는 미증유의 경제위기인 IMF 외환위기를 겪는다. 결과는 참혹했다. 민주화가 되고 한강의 기적으로 경제가 비약적으로 성장했다고 생각했는데 우리 앞에 닥친 건 기업의 줄도산과 대량 실업 사태였다. 그때 ‘한스밴드’는 학교 가기 싫은 딸과 실직한 아빠의 오락실 만남을 노래한 ‘오락실’이라는 가요를 통해 당시의 시대 상황을 기가 막히게 표현했다.
시험을 망쳤어 오 집에 가기 싫었어
열 받아서 오락실에 들어 갔어
어머 이게 누구야 저 대머리 아저씨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아빠
~
오늘의 뉴스 대낮부터 오락실엔 이시대의 아빠들이 많다는데
혀끝을 쯧쯧 내차시는 엄마와
내 눈치를 살피는 우리아빠
늦은 밤중에 아빠의 한숨소리
~
아빠 힘내요 난 아빠를 믿어요 아빠 곁엔 제가 있어요
아빨 이해할 수 있어요 아빠를 너무 사랑해요
국민들은 금을 모아 경제위기를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국민들이 넘은 건 끊임없이 밀려오는 신자유주의의 파고일 뿐이었다. 외환위기 당시 퇴직 직원들의 마지막 모습을 담은 제일은행 눈물의 비디오를 기억하는가? 당시는 그래도 정(情)이란 게 있었다. 하지만 야만이 일상화된 지금 남을 위해 흘릴 눈물은 말라버렸다.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1975년도 한국 남성의 평균수명은 60.2세였다.(2008년 생명표) 영화가 제작된 건 통계청 조사 당시보다 훨씬 앞선 1950년대이니 아마 당시 한국 남성의 평균 수명은 60세가 채 되지 않았을 것이다. 즉 극중 로맨스 바빠의 경우 기대여명이 십 년도 남지 않은 것이다.
영화 발표 당시로부터 육십여 년이 흐른 지금은 어떤가? 한국인의 삶은 100세를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직업 수명은 조금도 늘어나지 않았다. 1950~60년대의 로맨스 빠빠는 어떻게든 십 년만 버티면 되었지만 100세 시대인 지금 로맨스 빠빠가 퇴직을 하면 살아온 만큼의 세월을 더 살아야 한다.
한국 자본주의의 초창기인 1950년대나 2020년대나 로맨스 빠빠들의 불행은 결국 절대무변의 자본주의로부터 비롯한다.
이 영화 속에서 사위 우택의 직업은 관상대 공무원이다. 60년이 흐른 지금 변하지 않은 것이 또 하나 있다면 그것은 기상청의 오보다. 이 부분은 영화에서 확인하자.
우리는 IMF를 극복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전히 거리는 실업자로 넘친다. 우리는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넘으며 IMF를 극복했다고 착각한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코로나와 싸우고 있다. 대통령은 설을 앞둔 지난 11일 국민들과의 영상 통화에서 코로나가 끝나면 마스크를 던져버리고 만세를 부르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코로나의 종식은 아마도 새로운 패러다임의 시작일 것이다. IMF가 그랬듯이.
PS : <로맨스 빠빠>가 신성일의 스크린 데뷔작이다.
2021.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