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민 청년이 사랑하는 귀족 부인을 총으로 쏜 이유
『적과 흑』은 프랑스 작가 스탕달이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한 소설이다. 스탕달의 고향 작은 마을 교회에서 한 젊은 남자가 자신과 내연 관계였던 귀족 부인을 총으로 쏘아 중상을 입혔고, 살인미수로 체포되어 단두대에서 처형당했다. 『적과 흑』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 사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흘러간다.
주인공 쥘리앵은 가난한 집안, 부모와의 불화, 낮은 신분 등으로 불우하고 우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음에도 비범한 두뇌와 통찰력, 냉철한 이성을 지닌 청년이다. 왕당파와 자유주의가 첨예하게 대립하며 역사적 전환점을 맞고 있었던 왕정복고 시대의 프랑스는 그를 냉소적이고 위선적이며 야망이 가득한 패기 어린 인간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타고난 심성은 여리고 감상적이어서, 때때로 분노, 슬픔, 치기, 복수심 등에 흔들리기도 한다. 그런 쥘리앵은 작품 초반 배경인 촌구석 베리에르의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대도시 파리에서 마주한 권태와 허영을 마주하며 출세를 꿈꾼다.
자유와 로맨스로 상징되는 프랑스 답게, 이야기는 남몰래 나폴레옹을 추종하는 자유주의자 쥘리앵의 연애사를 따라 진행된다. 신분제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시기, 별 볼 일 없는 평민 출신의 명석한 주인공은 귀족들의 세계에 뛰어들어 멸시를 당하면서도 차가운 이성과 위선으로 무장한 채 출세의 기회를 노린다. 그렇게 쥘리앵이 찾아낸 돌파구는 다름 아닌 여인들이었다. 작품에서 쥘리앵의 공략 대상이 된 여인들은 베리에르 시장의 부인인 레날 부인, 후작 영애 마틸드, 그리고 페르바크 공작부인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인물은 레날 부인이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결혼해 아이 셋을 낳고 연애 감정을 느껴본 적 없이, 돈에만 눈이 먼 한심한 남편과 권태롭게 살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반항적이지만 강력한 위선으로 제 모습을 숨기고 있는 매력적인 청년 쥘리앵과 만나 금단의 사랑에 빠진다. 사랑의 감정을 처음 알게 된 레날 부인은 극도의 죄책감에 시달리면서도, 첫사랑에 빠진 누구나 그렇듯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모두 내던진다. 한편 자신의 신분에 의한 낮은 자존감을 채우고 사리사욕에 눈이 먼 한심한 귀족들에 대해 승리감을 쟁취하기 위해 레날 부인을 유혹하던 쥘리앵은, 그가 살면서 받아본 적 없는 무조건적이고 헌신적인 그녀의 사랑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자신의 모습 그대로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쥘리앵과 레날 부인의 불륜은 퇴폐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묘사된다. 매혹적으로 드러난 레날 부인의 하얀 팔과 손에 열정적으로 입을 맞추는, 성스러우면서도 에로틱한 장면이 대표적이다. 진실된 사랑과 감정 앞에 그 어떤 계산이나 위선 없이 있는 그대로 서로를 사랑하는 모습은 숭고하게까지 느껴진다. 특히 불우한 환경에서 자란 쥘리앵이 순수하고 맑아서 더욱 아름다운 레날 부인으로부터 받았을 위로와 평안은 가히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두 사람은 금단의 사랑이 진실하고 절실한 감정을 만났을 때 얼마나 열정적이고 무모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후 현실의 벽에 막혀 레날 부인과 이별한 쥘리앵은 마틸드 후작 영애를 만나 승부욕, 정복욕, 출세 수단으로 점철된 '머리로 하는 사랑'을 시작한다. 쥘리앵은 마틸드의 선민의식과 허영, 평범한 귀족 남성들에 대한 권태, 자극과 흥미를 쫓는 성격을 교묘하게 이용해 결국 자신을 사랑하게 만든다. 그러나 마틸드가 쥘리앵에게 느끼는 사랑은 진심이 아닌 허영과 오만, 위선이 만들어 낸 감정에 가깝고, 그 과정에서 쥘리앵은 출세를 할수록, 마틸드와 가까워질수록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억눌러야만 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자유를 잃어간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레날 부인의 등장과 그녀의 배신이 모든 상황을 반전시킨다. 쥘리앵은 마틸드를 임신시키고, 결국 그녀와 결혼해 막대한 재산과 지위를 얻기 직전까지 다다르지만 레날 부인이 쥘리앵과 자신의 불륜 사실을 고발하는 편지를 보내 쥘리앵의 출세는 수포로 돌아간다. 그리고 쥘리앵은 레날 부인을 찾아가 총을 쏜다.
쥘리앵은 왜 레날 부인을 쏘았을까? 단순히 자신의 출세를 망쳐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쥘리앵은 파리 생활을 하면서 이상하리만치 레날 부인을 생각하지 않았다. 3인칭 시점이기 때문에 실제로 쥘리앵이 레날 부인을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는 화자가 말하지 않는 이상 알 길이 없다. 하지만 그 숨 막히는 파리 귀족들 사이에서, 그리고 위선을 가득 채워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마틸드와의 관계에서, 그는 레날 부인을 한없이 그리워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레날 부인과 함께라면 모든 것을 드러내 놓고 마음껏 사랑할 수 있었던 자신의 모습도 그리워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연인만이 줄 수 있는 열정과 성애, 그로부터 오는 내면의 평화만이 쥘리앵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그런 존재가 자신을 부정했다. 레날 부인은 쥘리앵이 그녀에게 보여 주었던 모든 진실된 말과 행동들을 저열한 것으로 표현했다. 현실의 벽에 막혀 헤어졌지만 마음속 깊이 그를 위로하고 평온하게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 무신론자인 그에게는 마치 신과 같은 존재로 남아 있었던 성스럽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레날 부인, 그의 자아를 붙잡아 주고 있던 유일한 내면의 안식처인 그녀가 그를 배신한 것이다. 그 순간 쥘리앵에게 출세가 막힌 것 따위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출세를 하면 어쩔 것인가, 그는 그에게 주어진 지위와 재산, 그리고 변덕스럽고 오만한 마틸드를 부여잡고 평생 자신을 숨긴 채 위선을 떨며 고통스럽게 살아가야 할 것이었다. 그럴수록 그의 마음속에는 레날 부인이 필요했다. 하지만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해 준 유일한 존재에게 부정당하는 순간 그는 모든 삶의 의미와 의지를 잃었다. 그는 자유롭지 못했고, 평생 자유를 빼앗긴 채 힘겹고 불행하게 살아가야만 했다. 그런 그에게 남은 자유는 귀족들 틈바구니나 마틸드에게 종속당하지 않고, 모든 것을 부정한 레날 부인을 죽이고 자신도 죽는 길뿐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쥘리앵은 자살이나 다름없는 사고를 일으키고 감옥에 갇혀 재판을 받는다. 두려움에 떠는 마틸드나 푸케와 달리 쥘리앵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했다. 유일하게 그를 괴롭히는 것은 자신이 레날 부인을 죽였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어느 날 부상만 입고 회복한 레날 부인이 찾아온다. 쥘리앵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리며 레날 부인과 재회하고 용서를 빈다. 레날 부인은 자신의 편지가 종교적인 이유로 협박을 당해 작성되었음을 밝히지만 그건 쥘리앵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레날 부인을 원망하지 않았고 그저 사랑할 뿐이었다. 마지막 순간에 그를 찾아와 준 것이 감격스럽고 고마울 뿐이며, 그 인생의 유일한 안식처를 다시 찾은 기쁨에 행복을 느낀다.
이후 쥘리앵을 살리려는 레날 부인, 마틸드, 푸케의 온갖 노력들이 이어졌지만 쥘리앵은 진정한 행복과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산다는 것의 의미를 깨닫고 사형을 받아들인다. 그 때문에 마틸드의 인생 역시 무너졌으나, 쥘리앵은 끝까지 레날 부인만을 생각했고, 그녀가 자신 때문에 역경에 처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쥘리앵은 죽기 전 남은 나날 동안 레날 부인과 애틋한 사랑을 나누었고, 쥘리앵을 따라 죽으려는 레날 부인에게 살아서 자신의 자식(마틸드와의 자식)을 키워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쥘리앵은 단두대에서 처형당한다.
마틸드는 자신이 오래전부터 꿈꿔왔던 대로 대담한 일을 하다 죽은 남편의 머리를 들고 입을 맞춤으로써 비련의 여인이 되어, 허영으로부터 만들어진 이상 속 자신의 모습을 완성시킨다. 그리고 레날 부인은 쥘리앵의 뜻에 따라 자살하지 않았지만, 쥘리앵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쥘리앵이 가르쳤던 자신의 아이들을 품에 안은 채 죽는다.
쥘리앵은 당시 신분제에 막혀 꿈을 꾸는 것조차 어려웠던, 하지만 능력 있고 야망이 있었던 평민의 삶을 대변한다. 이는 작가인 스탕달 자신을 투영한 것이기도 하다. 스탕달 역시 비귀족 출신에 출세를 노렸으나 실패한 경험이 있다. 그러한 자신의 경험과, 평민 청년이 내연 관계에 있던 귀족 부인을 총으로 쏜 실제 사건을 엮어 이 작품을 써냈다. 왕정복고 시대였던 당시에는 이렇게 출세를 꿈꾸는 평민 청년의 고뇌가 주요 소비층인 귀족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했고, 평민이 귀족 여인들을 꾀어내는 내용이 받아들여졌을 리도 만무하다. 그러나 다행히도 1830년 7월, 7월 혁명으로 귀족 체제가 붕괴되면서 이 작품도 출간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출간 당시는 과도기적 시대였던 탓에 대중에게 외면받았고, 결국 스탕달 사후에 재평가되어 인정받았다.
주인공 쥘리앵의 냉소적인 시선으로 바라본 당시 프랑스 사회에 대한 비판과 풍자, 그 혹독한 세상에서 야망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쥘리앵의 성장과 사랑, 그리고 자기 파괴까지. 격변하는 사회상과 그 안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의 심리와 삶의 면면을 비극적이면서도 아름답게 그려낸 매력적인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