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오노레 드 발자크 『고리오 영감』

욕망의 도시, 19세기 파리의 민낯

by 이내

『고리오 영감』은 혁명과 왕정복고를 거치며 격변기를 맞고 있던 19세기 초반 프랑스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귀족 중심의 기존 질서와 막 부상하기 시작한 부르주아의 새로운 물결이 공존하고 충돌하면서 그로 인한 혼란과 갈등, 기회와 쾌락이 가장 극대화된 도시 파리. 부유하고 화려한 중심가와는 거리가 먼 한 골목에 위치한 보케 하숙집이 이 작품의 주 무대다. 하층민의 삶이 그대로 묻어나는 이 하숙집에는 파리의 모습만큼이나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중 작품의 중심이 되는 인물은 가난한 대학생 외젠 라스티냐크, 그리고 왕년에 사업가로 부자였지만 두 딸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 근근이 살아가는 고리오 영감이다.


외젠은 귀족 출신이지만 집에서 학비와 생활비를 대주는 것도 빠듯할 정도로 가난하다. 그는 출세하기를 열망하고, 그러려면 무엇보다 귀족이든 부르주아든 사회 주도층과의 인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고는 파리 사교계를 휘어잡고 있는 그의 사촌 보세앙 자작 부인을 찾아간다. 외젠은 그녀의 도움으로 사교계에 발을 들여놓으나, 사교계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몸을 치장하고 사람들과 유흥을 즐기기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돈과 사랑(사교계 인맥)을 좇게 된 외젠은 중요한 두 여인, 레스토 백작 부인과 뉘싱겐 남작 부인을 알게 된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 두 여인은 자매였으며, 그 아버지가 다름 아닌 같은 하숙집에 살고 있는 고리오 영감이다.


외젠의 옆방에 사는 고리오 영감은 젊은 시절 제면업으로 큰돈을 벌어 귀족 부럽지 않게 살았는데, 두 딸의 행복을 위해 모든 재산을 쏟아부었고, 정작 자신은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외젠은 고리오 영감에게 호감을 보이고 친하게 지내며 둘 중 더 마음에 들었던 뉘싱겐 부인에게 접근할 기회로 삼는다. 그리고 고리오 영감의 도움을 받아 결국 외젠과 뉘싱겐 부인은 연인이 된다. 뉘싱겐 부인에게도 의도가 있었다. 남자로서 외젠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그가 보세앙 자작 부인의 사촌이기에 그를 통해 사교계에 진출하고 싶었던 것이다. 뉘싱겐 남작은 은행가로 막대한 재산을 가지고는 있으나 신분이 낮아 좀처럼 상위계층에 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외젠은 뉘싱겐 부인의 돈이, 뉘싱겐 부인은 외젠의 인맥이 필요했고, 다행히 이성적으로도 끌려 연인이 된 것이다.


이러한 등장인물들 간의 구도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혼란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귀족 계층과 부르주아, 신분과 돈, 자신이 갖지 못한 것에 대한 탐욕, 흔해 빠진 내연 관계들과 그에 대한 도덕적 해이 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특히 자매인 레스토 부인과 뉘싱겐 부인은 각자 대척점에 있다. 둘 다 장사꾼이었던 고리오 영감의 딸이지만, 고리오 영감의 막대한 투자로 각자 상위 귀족과 부유층에 시집을 갈 수 있었다. 그런데 레스토 부인은 내연관계에 있는 남자의 도박 빚을 계속 갚아 주느라 모든 돈을 다 써버리고 동생의 부를 부러워한다. 뉘싱겐 부인은 신분이 낮아 사교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데에 콤플렉스가 있어 언니를 부러워한다. 그래서 그 둘은 타인보다 사이가 나빠지는 지경에 이른다. 이렇게 당시 사회에서 주도권 다툼을 하던 귀족과 부르주아 계층을 두 부인을 통해 조망할 수 있다. 그리고 두 부인을 통해 당시 파리에 만연했던 허영과 부도덕, 집착, 비인간성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그만큼 이 두 자매는 됨됨이가 한참 잘못되어 구제불능인 지경에 이르러 있다.


그런 그녀들을 키운 건 고리오 영감이니, 그에게 1차적인 잘못이 있을 것이다. 고리오 영감의 부인은 일찍이 사망하여 그 혼자서 두 딸을 키웠다. 그는 두 딸이 원하는 것이라면 자기 목숨이라도 갖다 팔 정성으로 모든 것을 다 들어주었다. 실제로 작품 초반 고리오 영감은 몇 남지 않은 자신의 은제 식기들을 늙은이의 얼마 안 되는 힘으로 익숙하게 우그러뜨려 내다 팔아 돈을 마련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는 나중에 자신의 연금까지 팔아 딸들에게 갖다 바친다. 그렇게 모든 걸 다 들어주며 오냐오냐 키운 딸들이 세상 물정 모르고 부도덕하며 심성이 못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다. 그녀들은 그렇게 헌신한 아비 고리오 영감을 하찮고 부끄러운 존재로 여긴다. 이제는 가진 것도 없고 귀족도 아닌 데다가, 무엇보다 그녀들의 남편들이 고리오 영감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에도 고리오 영감은 그녀들이 행복하기만 하면 자신은 그 무엇도 필요 없다면서 계속해서 쥐어 짜내고 짜내어 돈을 마련해 딸들에게 준다. 그야말로 부성애의 그리스도라 할만하다. 외젠은 그런 고리오 영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결론적으로 뉘싱겐 부인과 자신에게도 집을 얻어 주는 등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고맙게 받아들인다.


이야기는 고리오 영감이 죽어가면서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다. 뉘싱겐 부인은 남편이 파산하면서 가진 돈을 모두 잃을 위기에 처하고, 레스토 부인은 정부에게 모든 재산을 갖다 바친 데다 두 아이의 친부가 그 정부였음을 남편이 알게 되면서 파국을 맞은 와중에도 계속 정부를 돕기 위해 돈을 구하러 다닌다. 이렇게 또 돈이 필요해진 두 자매는 고리오 영감을 찾아가고, 이에 충격을 받은 영감은 쓰러진다. 이후 그는 회생의 여지를 보이지 못하고 점차 죽어간다. 그런 그의 곁을 지키는 건 두 딸이 아니라 외젠과 그의 친구인 의사 비앙숑뿐이다. 두 딸은 보세앙 부인이 여는 파리 최대의 무도회에 참석하느라 혈안이 되어 있다. 외젠은 두 여자를 번갈아 찾아가며 죽어가는 아버지를 돌봐달라 요청하지만 자매는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결국 고리오 영감은 죽음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두 딸의 배은망덕한 모습에 정신을 잃고 그녀들을 모욕하고 저주하다가 갑자기 다시 딸들을 축복하고 그리워하며 최후를 맞이한다. 심지어 두 딸은 영감의 장례식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런 모습을 모두 지켜본 외젠은 두 여자뿐만 아니라 그녀들을 그렇게 만든 파리라는 도시와 사회 면면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다. 그는 더 이상 뉘싱겐 부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파리에 대한 도전이자 파리에 맞선다는 마음가짐으로 뉘싱겐 부인을 찾아가며 작품이 끝난다.


여기서는 두 자매를 중심으로 서술했지만, 실제 작품 내에서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물질 만능주의와 인간 경시에 대한 모습들은 그 밖에도 매우 다양한 인물과 사건들을 통해 나타난다. 외젠에게 암담한 현실을 예고하며 결혼과 살인 등의 음모로 큰돈을 벌어 보자고 꼬드기는 보트랭, 고리오 영감의 돈을 보고 그에게 접근했다가 실패하자 그를 놀림감 삼고, 그가 죽는 와중에도 자신의 장사만 걱정하는 하숙집 주인 보케 부인, 돈 몇 푼에 함께 사는 탈옥수 보트랭을 경찰에 넘긴 미쇼노와 푸아레, 그런 그들을 비난하며 내쫓는 다른 하숙인들, 사업에 실패해 부인의 돈을 갈취하는 뉘싱겐, 도박을 끊지 못하고 레스토 부인의 돈을 갈취하는 그녀의 내연남 등. 작품을 읽는 내내 대부분의 인물들로부터 혐오감을 느낄 정도다. 주인공 외젠은 자신도 그러한 길을 걷기 위해 가족들의 돈을 뜯어내고 빅토린을 유혹하려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후반부에서는 고리오 영감에게 연민을 느끼고 그의 죽음을 지켜 주며 지금까지 보아 온 그 모든 부조리에 맞서 싸우겠다는 다짐을 함으로써 그나마 위안을 준다. 그런 그를 돕는 비앙숑이나, 아버지에게 쫓겨나 종교에 의지해 살아가는 빅토린 정도가 이 작품에서 그나마 인간성을 보이는, 혹은 혐오스럽지 않은 인물일 것이다.


고리오 영감의 경우는 조금 더 특별하다. 딸들에 대한 그의 헌신은 처음엔 고귀하게 보이나, 반복될수록 그리고 그가 지나치게 과장된 모습을 보여줄수록 그 헌신은 이해하기 힘든 병적인 집착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끝내 그런 그의 집착이 딸들을 제대로 키워내지 못한 패착이었음을 확인하고 나서는 그가 한편으로는 불쌍하면서도 혐오스럽게 여겨지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작품 전반적으로는 매우 사실적이고 세세한 묘사, 등장인물들의 뚜렷한 개성 등이 몰입감을 준다. 19세기 문학, 주로 러시아 문학에서 나타나는 극사실주의적인 작법이 시작된다는 느낌을 받았다. 특히 작품 초반부 보케 하숙집을 구석구석 벽지에서 장판에 이르기까지 묘사하는 부분은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등장인물들의 모습과 성격을 상상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냈다. 내용이 길지 않고 등장인물이 그다지 많은 것도 아니며, 시공간적 규모도 작은 편이지만 연상되는 작품들이 많다. 모든 것을 잃은 고리오 영감과 그를 배신한 두 딸을 보면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이, 상류층으로 나아가기 위한 외젠의 고군분투와 성장기를 보고 있자면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이, 유부녀와 젊은 청년의 사랑을 보면 스탕달의 『적과 흑』이, 보트랭에 의해 음모를 수행할지 갈등하는 외젠의 모습을 보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 죽어가며 자신의 지난 인생을 후회하고 절망하는 고리오 영감을 보면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이, 화려한 사교계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여인들의 암투, 시기들을 보고 있자면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 떠오른다. 그만큼 발자크는 이 『고리오 영감』의 등장인물들에 뛰어난 캐릭터성을 부여했으며 짜임새 있는 스토리와 정성 들인 묘사들이 이 작품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특히 사랑, 가족, 죽음, 사회, 인격, 음모, 돈, 열정, 성장 등 다양한 주제들이 깊이 있게 다루어져 인간 사회와 인간 자체에 대한 총체적인 고찰을 가능케 한다.


발자크는 『고리오 영감』을 포함해 자신이 일평생 써온 작품들을 모아 『인간 희극』이라는 총서를 구성했다. 이들은 각기 독립된 작품이면서 등장인물과 세계관을 공유한다. 이러한 인물의 재등장 기법은 발자크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는 오늘날 작품 속 거대한 세계관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냈다. 특히 『고리오 영감』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다른 작품들을 통해 뻗어나가면서, 『인간 희극』 세계관을 구성하는 데 있어 『고리오 영감』이 그 기반의 역할을 했다고 평가된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