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망함도 나니까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모든 날이 좋았던 여행이었다.
삶에서 우울했던 날,
평소라면 절대 흔들리지 않을 제안에 펄럭 넘어가 바람처럼 비행기에 몸을 싣고 제주도로 떠났다.
처음 만난 제주는 나에게 다시 한번 힘내서 삶을 살아볼 에너지를 주었다.
왜 우울했을까.
더 이상 내 안에 무언가 쏟아낼 에너지가 없는 느낌.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거대한 목표에 노력을 쏟아붓다가
아뿔싸!
지금 문제는 노력이 부족한 게 아니야.
독이 깨진 거야!
이걸 깨달아버린 순간이었다.
미세한 균열은, 틈은, 그 시작은 어디었을까
태어남이라고 적기엔 무책임하고 자라남이라고 적기엔 애썼던 지난날이 아프다.
만났던 모든 이들이 소중하고 했던 모든 일들이 치열했다.
그 어느 순간도 아무것도 하지 않은 순간조차 나의 마음은 늘 처절했다.
돌아보지 말고 나아가자.
바꿀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자.
그래서 난 원인을 묻지 않기로 결정했다.
시작이 어디였든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지금이 쉼표를 찍을 순간이라는 것.
나이가 든다는 것은 이런 건가보다.
본능적으로 쉼표의 자리를 아는 것.
여유가 없을 때에도 훌쩍 떠날 수 있는 것.
지나고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후회할지도 모르는 일을 하는 것.
무엇이 문제인지 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어디로 갈 것인가' 그걸 생각했다.
아니, 사실은 제주에 있던 4일 동안 나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저 순간을 즐겼다.
내 마음만 열심히 일을 했다.
자신을 이어 붙이느라 바빴다.
내 마음은 제주의 날씨와 닮았다.
맑았다 흐렸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고
예보는 믿을 수 없고
예상을 빗나간다.
그래도 좋다.
날이 좋아서
날이 좋지 않아서
모든 날이 그저 나라서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