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빨간 머리 앤 Jun 20. 2024

사회가 말하는 '선택'의 의미

그게 과연 선택이었을까?

우리 사회는 자살을 주로 '극단적 선택'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개인의 자살을 삶의 끝에 몰린 사람들이 대안으로써 선택하는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것을 개인의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선택 選擇

1. 여럿 가운데서 필요한 것을 골라 뽑음.
2. 생명 적자생존의 원리에 의하여, 생물 가운데 환경이나 조건 따위에 맞는 것만이 살아남고 그렇지 않은 것은 죽어 없어지는 현상. 자연 선택과 인위 선택으로 나눈다.
3. 심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몇 가지 수단을 의식하고, 그 가운데서 어느 것을 골라내는 작용.

선택에는 여러 뜻이 있다. 그러나 그 본질은 결국 여러 가지 가능한 해결책 가운데 가장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고르는 행위라는 점에 있다. 따라서 자살을 극단적 ‘선택’이라 부르는 데에는 그들의 죽음 역시 개인에 의해 주체적으로 선택된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된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자살은 대체로 그런 능동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다.

자살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뇌와 몸의 반응 변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현상일 수도 있다. 개인의 선택이라는 관점은 틀릴 수 있음을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한다”

우리 사회는 패자들에게 - 좌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선사한다. 따라서 궁지에 몰린 그들의 선택은 자율적인 상태에서 내리는 합리적인 의사 결정이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는 결정일 수 있다. 우울에 관한 권준수 교수님의 강의를 통해, 이것이 단순히 심리적인 기재뿐만 아니라 뇌의 신경체계에도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자살을 개인의 선택으로 부를까. 이것은 어쩌면, 우리가 자살을 개인의 선택으로 정의하는 것이 정말 자살을 개인의 선택으로 여기기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여기고 싶기 때문’이 아닐까.


선택이 함축하는 것은 ‘책임’이다. 내가 무언가를 선택한다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그 행위를 하겠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 행위에 수반되는 모든 도덕적 당위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렇기에 자살을 개인의 선택의 영역에 둠으로써 사회는 온전히 개인에게 그 책임의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다.


나는 왜 이렇게 선택의 문제에 예민해졌을까.

요즈음 들으면 참 숨이 막히는 말이 있다. 의외로 그것은 바로 네가 원하는 일을 하라는 말이다.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쉽게 건네는 해결책이자 응원의 말이다.

물론 참 고마운 말이다. 나의 선택의 지지하고 응원하겠다는 말이니. 그러나 선택이 어려운 나에게, 아직 온전히 나의 삶을 책임질 준비가 되지 않은 나에게 그 말은 그저 부담스러운 말일뿐이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에게는 그저 ‘도대체 내가 진정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의 범주는 무엇‘인지 -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뭐가 있는데? 돈 아니면 자아실현, 아니면 그 무엇도 가질 수 없는 쪽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 그렇다면 내가 선택한 직업은 온전히 나의 선택이므로 어떤 실패에도 책임은 온전히 나의 몫이라는 것인지와 같은 비관적인 생각만 따라오곤 한다.

결국 나에게 자율성을 부여하는 선택이라는 말이 나에게는 그저 ‘개인으로서의 네가 네 운명의 온전한 - 그리고 유일한 책임자’라는 말로만 들린다는 것이다.


물론 선택과 책임의 상관관계를 부정하고픈 생각은 없다.

주식 투자를 선택했다가 실패한 사람들을 정부에서 구조해줘야 할 의무는 없는 것처럼, 자신의 선택에는 필연적인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그러나 과연 어디까지가 선택이고, 어디까지가 선택에 대한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부여될 수 있는 의무일까. 그 불분명한 경계에 대한 고찰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그냥 짧은 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