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 도착한 지 한 달 남짓이 지났을까. 마침내 그 유명한 London Kings X station으로 떠났다.
첫 번째 런던 여행은 함께 교환을 온 본교 친구들과 떠났다. 교환교에서의 OT 이후 다음 만남이 바로 런던 여행이라니, 꽤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국에 나와서 그런지, 한국인들과도 외국 마인드로 소통하게 되는 기분이었다.
리즈에서 런던까지는 기차로 2시간 30분 남짓이 소요됐다. 수업이 마치고 출발하려니 너무 늦어서 아쉬웠는데, 덕분에 기차의 창문 너머로 꽤나 멋진 저녁노을을 즐겼다.
첫 저녁식사는 런던에 거주했던 친구가 추천한 파스타 집에서 이뤄졌다. Pastation이란 식당이었는데, customizing의 국가답게 면의 종류와 소스 그리고 토핑류를 각각 선택할 수 있었다. 물가 살벌한 런던에서 찾기 힘든 가성비 식당이었다.
까르보나라 광인이었던 그 시절의 나는 리카토니 건면과 까르보나라 소스를 택했다. 꽤나 괜찮은 외관에 기대했던 것도 잠시, 파스타는 의심할 여지없이 끔찍한 영국의 맛이 났다.
식사를 끝마치고 빅벤의 야경을 보기 위해 템스 강변으로 걸어갔다. 강가에 가까워질수록 바람이 매서워졌다. 쌀쌀함에 귀가가 그리워지던 시점에 마주한 빅벤의 야경은 꽤 멋졌다.
밝고 반짝이는 것들을 사랑하는 엄마의 궁금증과 기대를 안고 찾은 런던 아이는 평범했다. 라붐을 최고의 영화로 꼽는 엄마에 비해 나는 너무나 냉소적인 사람이어서 편집된 판타지 같은 런던 아이에 큰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어디에나 있는 거대한 대관람차가 왜 한 도시의 상징이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야경 투어를 마치고 영국의 펍 문화를 즐기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엄청난 소음 탓에 어떤 이야기도 나눌 순 없었다.
아침엔 대영 박물관을 찾았다. 아무도 유물에 큰 관심을 갖진 않았지만, 안 가보면 평가조차 어려우니까
대영박물관 내에 한국관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야 할까 슬퍼야 할까? 대영박물관은 참으로 묘한 기분을 자아내는 공간이었다.
점심은 Honest burger에서 먹었다. 런던 전역에 있는 체인점으로, 무난한 맛을 가진 식당이었다.
이번 여행에선 음식에 대한 선택권이 별로 없었다. 런던에 살았던 친구가 함께하기도 했고, 4명 이상 되는 단체에선 개인의 의견을 피력하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근본적으론 영국이란 나라가 원래 음식에 큰 열정이 없고, 따라서 굳이 먹어야 할 음식도 없기에 쉽사리 결정권을 포기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오후에는 national gallery를 방문했다. 1층까진 함께였으나 각자의 템포가 너무 달랐던 나머지 어느 순간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뮤지컬도 각자 원하는 뮤지컬을 보기로 한지라, 나 역시 아주 느린 속도로 감상했다.
18번 관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갑자기 한 청년이 그림을 보던 내게 말을 걸었다. 편의상 그를 A라 지칭하겠다. A는 내게 눈앞에 있는 루벤스 그림의 의미를 아냐고 물었다. 미처 내 답을 듣기도 전에 그는 이 그림이 로물루스 신화에 관한 이야기라며 설명을 늘어놓았다. 대화는 다음과 같이 이어졌다.
A: 너는 런던의 예술 학교 학생이니?
나: 아니. 난 리즈에서 공부해
A: 그럼 미술 쪽 공부하니?
나: 아니.
A: 그럼 만화? 예술 쪽은 맞지?
나: 아니. 난 철학 공부해. 여긴 교환으로 왔어.
A: 그럼 누구 좋아하니? 쇼펜하우어?
나: 아니, 니체.
A: 니체를 좋아한다고? 그럼 너는 행복하지 않아. 니체는 염세주의자잖니. 그럼 너 카프카도 좋아하니? 좋아하는 다른 철학자는?
나: 응. 그런데 사실 동양 철학 위주로 공부해서 동양의 철학자들을 좋아해.
A: 그럼 도교는 좋아하니?
나: 그런 편이야.
A: 그래. 도교는 좋아. 너는 현실을 사랑해야 해. 지금 이 순간을 즐겨야 행복해질 수 있어.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서 살아야 해!
우스운 대화가 한참 이어지던 시점이었을까, national gallery의 폐관 시간이 다가왔다. 당시에는 니체도 잘 모르면서 행복만 부르짖는 청년과의 대화로 인해 G층까지 보지 못했음이 아쉬웠으나, 돌이켜 보니 나는 이후로도 약 5번 정도 더 national gallery를 방문하게 되었고, 그 아저씨는 '니체의 말' 따위를 출판하며 니체를 자기애가 가득한 낙관주의자로 전락시키는 이들보다야 니체를 훨씬 잘 알고 있었다.
런던 여행을 동행했던 친구들은 모두 확고한 취향과 명징한 의견을 가진 편이었다. 그래서 고작 4명뿐이었음에도 의견을 수렴하지 않고 각자 원하는 뮤지컬을 보기로 했다. 내가 택한 것은 약 n년 전 미국 여행에서 조느라 제대로 보지 못한 뮤지컬, phantom of the opera였다.
이때 이후로 나는 아직도 phantom of the opera의 넘버를 듣는다. 가장 좋아하는 넘버는 the point of no return. 큰 소리로 그 노래를 듣고 있으면 단번에 런던의 한 극장으로 돌아간 기분이 든다.
뮤지컬을 보고 난 뒤에는 어김없이 펍에서 모였다. 난 흑맥주인 Guinness를 골랐다. 아일랜드 접경국이어서인지 유난히 맛이 좋았다
런던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브런치 식당. 대영박물관과 러셀스퀘어 근처에 자리해 있어 접근성도 좋다.
식사 후에는 캠든 마켓 쪽을 방문했다.
캠든에는 사람도 많고 빈티지도 많았다. 빈티지 제품을 좋아한다면 가볼 만하다 생각하다가도 가격을 생각하면 곤란해지는 부분이 있다.
지킬 앤 하이드 같은 런던 날씨. 화창하다가도 삼분 만에 폭풍우가 칠 것 같은 하늘로 변한다.
영국에서 1달간 체류하며 익숙해진 우리는 날씨에 굴하지 않고 테라스에 앉아서 커피를 즐겼다.
저녁은 차이나 타운에서 먹기로 했다. 화려한 소호 거리를 지나면 사람들이 북적이는 차이나 타운이 나온다. 더없이 화려한 공간이다.
유럽의 중식은 본토의 맛과 흡사하다. 한국과 달리 이주한 중국인들이 직접 가게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맛도 애매하면서 비싼 유럽의 한식당과 달리 맛도 가격도 훌륭하다.
아침엔 버킹엄 궁전의 행차를 보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우습게도 우린 결국 군인들의 행렬을 보지 못했는데, 대대적인 마라톤 행사 탓에 가는 길목마다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그 대신 귀여운 펠리컨들을 봤다.
점심은 Dishoom이라는 인도식당에서 했다. 역시 인도인들이 해서 그런지, 현지의 맛이 났다.
기차 시간까지 남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리즈에도 있는 Waterstones에 들렀다. 그런데 리즈에서 보지 못했던 화려한 펭귄 클래식 시리즈가 눈을 사로잡는 것 아니겠는가. 멋진 표지에 참지 못하고 결국 세권이나 구매했다. 구매한 책은 War and Peace, The Divine comedy, Les miserables. 집에 한국어 책이 있지만 렐루 서점에서 Wuthering Heights를 구매했 듯, 굿즈 개념으로 구매했다.
고백하자면 영국에서 한국어 책을 사기 어려우니까 영어책이라도 사서 읽자는 마음이었는데, 내 영어실력과 끈기를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 같다. 나의 독서의지와 심심함은 깨알 같은 줄글 앞에서 처참히 붕괴했다.
리즈로의 귀한이 정해져 있던 날에는 스콘을 먹으러 갔다.
Gentlemen Baristas의 스콘은 - 혹시 이 가게의 스콘을 추천해 주는 이가 있다면 그이의 입맛이나 관계를 한 번쯤 재고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 맛이 없었다.
내가 본 가장 우울하고 우중충한 빅벤이지만, 그래서 가장 영국적이다.
리즈로 돌아가기 직전엔, Kings Cross 바로 앞에 있는 EKACHAI에서 Asian 음식을 먹고 마무리했다. 역시 체인점이지만, 리즈에는 이만한 음식점이 없어서 꽤나 만족스러웠던 기억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