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쩔 수가 없다, 체념의 언어

by 비갠 날 성혜

어쩔 수가 없다, 체념의 언어

영화 “어쩔수가없다”를 보고


전원주택에서 가족이 바비큐로 회사에서 보내준 장어를 구워 먹는다. 가장인 이병헌은 장단 잘 맞춰주는 아내, 시크한 청소년 아들, 어딘지 조금 이상한 어린 딸, 그리고 두 마리 개까지 밝은 가을 햇살 아래에서 하나가 둥글게 얼싸안는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라고 중얼거리며,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그 장어는 구조조정으로 회사에서 보낸 해고 선물이었다. ‘다 이룬’ 가정을 가장은 반드시 지켜 내야 한다. 그런 가장의 부도덕한 행위는 가족을 지키고 책임지려면 당연한 행동이다. 그래서 살인조차 ‘어쩔수가없다’.

아내인 손예진은 가장이 지켜내려는 애쓰는 것을 잘 알기에 가장의 모든 부도덕을 눈 감아 주어야 한다. 아내로서 같이 가정을 지키기 위해 ‘어쩔수가없다’. 아들은 뭔가 잘못된 것 같아도 부모님이 그렇다니 믿을 수밖에, 다른 선택이 없다. 그 또한 ‘어쩔수가없다’.


나 역시 가장의 실직이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사람으로서 재취업을 위해 취업에 경쟁자가 될 만한 사람을 없애려는 가장의 절박한 전쟁이 이해가 된다. 가장의 실직은 가족이라는 작은 우주가 무너지는 일이다. 먹고 자는 일조차 편하게 할 수 없는 불안은 가족 간에 작은 여유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까지 서로를 찌르는 가시가 되고 갈등이 된다.


“어쩔수가없다”가 불편한 것은 실직이 주는 절망 때문만이 아니다. 내 어설픈 도덕성이 블랙코미디의 편하게 웃을 수 없는 웃픈 상황마다 나를 불편하게 한다. 자신의 전부였던 사랑하는 일을 할 곳이 없어진 상황이지만 다른 일은 하고 싶지 않다고 울부짖는 장면, 자신의 일을 얼마나 좋아하는 지를 고백하는 장면, 아내의 외도를 보고 괴로움으로 혼자 미친놈처럼 마당을 뒹구는 장면, 무엇보다 기계화로 실직이 더욱 가속화되는 상황 등.

화면의 모든 캐릭터가 살아있고, 배우들의 연기도 잘 녹아난다. 어설픈 살인이 웃음을 선사하고, 그 상황에 공감으로 때로는 눈물이 찔끔 났다. 그러나 역시 블랙코미디는 마음 놓고 웃을 수 없다. 우리가 언제 ‘어쩔 수가 없다’는 말을 쓰는가. 대부분 난감하고 체념적인 순간, 자조적으로 내뱉는다. 이제 말의 지닌 잔혹성을 알기에 함부로, 편하게 쓰지 못할 것 같다. 이해되고, 웃음을 선사한 그 말이 마음 한 구석을 무너뜨리는 언어가 되었다.

#어쩔수가없다 #실직 #가장

keyword
작가의 이전글꾸밈에서 돌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