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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침묵 사이, 다정함을 배우다

『맡겨준 소녀』를 읽고

by 비갠 날 성혜

말과 침묵 사이, 다정함을 배우다

『맡겨준 소녀』를 읽고


페이스트리는 켜켜 얇은 막이 있어 조심스럽게 다루어야한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다루어도 입에 넣고 자르는 순간 가루가 떨어진다. 손으로 살살 떼어도 작은 조각이 떨어진다.


어떤 소설은 바싹하게 구은 페이스트리처럼 읽는 동안 애잔함이 조각처럼 흩어진다.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이 그랬다. 주인공 소녀인 ‘나’, ‘나’를 맡아준 킨셀라 아주머니와 아저씨, 집 안팎이 모든 일을 하느라 눈 맞출 틈조차 없는 엄마. 그들 모두는 목구멍까지 감정이 차 올라, 바람이 빠지길 기다리는 빵빵한 풍선 같았다.


엄마는 다섯째를 임신 중이다. 작년의 풀 베는 품 삵을 올해 줄 만큼 집안 형편은 어렵다. 결국 ‘나’는 엄마의 먼 친척인 킨셀라 부부에게 잠시 맡겨지게 되었다. 아이를 맡기로 간 아빠는 “먹기야 많이 먹겠지만 대신 일을 시키세요.”(p18)라는 말은 하지만 아이에게는 한 마디 인사도 없이 거칠게 운전하며 떠났다.


‘나’는 킨셀라라 부부의 말 없지만, 정돈 잘 되고, 정갈한 음식이 넘치는 부엌처럼 배려있고 따뜻한 보살핌 속에 한 계절을 지낸다.

아빠랑 손 잡아보는 등, 평범한 가족이라면 자연스러운 일상을 ‘나’는 킨셀라 집에서 경험 한다. 그 속에서 ‘나’는 제대로 대답하는 법이나 읽기만 배운 것이 아니다.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걸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p73)라는 의미도 조금씩 체득했다.


말은 절로 떠도는 먼지가 아니가. 말은 우리 속에 길러져서 나온다. 가끔 내 의도와 다른 말이 나오는 때가 있다. 그런 말조차 생각하면 깊은 곳에 있던 나일 수 있다. 말 하지 못하고 이름이 불리지 못 하는 침묵 속에 들어나는 감정의 결도 있다. 고추의 실로 짜는 거미줄처럼 말과 침묵으로 관계를 만들고 들어낸다. 그런 것을 ‘나’는 체득하고 배운다.


그렇게 여름 한 시절을 보내고 ‘나‘는 집으로 돌아온다. ‘나’는 떠나는 킨셀라 아저씨를 꼭 안고, 차 안에서는 “아주머니가 목구멍 속으로 흐느끼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는 소리를 듣는다. 꼭 한 명이 아니라 두 명 때문에 우는 것 같다.”(p98)


『맡겨진 소녀』는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며 다정함을 한 번도 받아보지 못 한 아이가 다정함을 받고, 배운다. 반대로 소중함을 아는 가족 곳에 아이가 어떤 역할을 하는 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느끼게’ 한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을 때 느꼈던 것처럼 마음을 툭툭 건드는 묘사가 중의적인 표현과 어울려져 있다. 바닷가에서 아저씨와 둘이 산보를 하고 오는 길에 파도의 갈 때 아저씨의 발자국을 다 지웠다. 아저씨가 그걸 보더니 “저기서는 네가 날 업고 왔나 보다.”라고 이야기한다. 그 말의 의미는 책을 읽으면 이해가 된다. 마지막 문장에 ‘나’는 “아빠”를 부른다. 생물학적 ‘아빠’일까, 내 마음에 다정함을 알려준 아저씨를 부르는 걸까.

클레어 키건의 소설은 그 섬세함으로 깊은 공감을 느끼게 한다. 폭발할 것 같은 감정을 부드럽게 풀어, 맑은 날에 햇살에 널린 이불 홑청처럼 잔잔하게 스며든다. 다정함이란 어쩌면, 그 이불을 함께 널어본 사람끼리만 아는 햇살의 결 같은 것은 아닐까.


#클레어키건 #맡겨진 소녀 #말 #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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