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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랜턴 Aug 13. 2024

2백만 원짜리 트램펄린

아이의 추억에 부모가 함께 한다는 것

딸네 집으로 트램펄린이 배달되어 왔다.

지게차에 실려 나온 거대한 부피의 트램펄린은 아직 조립되지 않은 상태다. 사위와 남편이 평일 저녁과 주말에 틈틈이 조립하기로 했지만, 여러 개의 상자들과 부품들로 포개져 있는 것이 딱 봐도 만만해 보이지 않는다. 때마침 아들 내외로부터 주말에 다녀간다는 문자가 왔다.

'그럼 됐네!'

사위가 표 나게 반가워했고, 나와 딸은 '잘됐네!' 맞장구를 치며 그대로 주말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금요일 오후 이른 저녁을 먹고 어른 여섯, 아이 둘이 트램펄린 박스 앞으로 모였다. 딸은 상자를 열어 부품을 꺼내고, 사위와 아들은 설명서를 들여다보며 조립을 의논한다. 남편은 풀어져 나온 상자들을 정리하느라 바쁘고, 나와 며느리는 손자 두 놈을 데리고 노느라 뒷마당 전체가 왁자지껄했다.


둥그런 받침대를 세우고 가운데 뜀틀을 고리마다 걸기 위해 세 명의 남자들이 낑낑거렸다. 크기가 어른 30 명이 서있어도 될 만큼 사이즈가 어마어마하다. 호기심을 못 참고 남편이 먼저 물었다. '이게 얼마야?'


'이백만 원이에요'


허걱! 애들 노는 건데 너무 큰 거 아니냐, 이것 때문에 뒷마당이 꽉 차서 다른 건 놓을 수도 없겠네, 적당한 걸로 사지 그랬냐... 며, 남편의 소심한 타박이 이어졌다. 그러니까 이렇게 비싸지 않고 크지 않은 걸로 사서 마당 한쪽 구석에 놓고 아이들끼리 놀게 해도 될 텐데 왜 이렇게 쓸데없이 낭비를 하고 있느냐는 것이 남편의 요지였다.



사위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제 주말마다 OO이 친구들 초대하려고요. OO이 사회성 발달에도 도움이 될 것 같고, 애들 돌보는 것도 덜 힘들 거고, 지금부터 아이들 클 때까지 한참 동안 쓸 생각하고 샀어요. 좀 비싸긴 하지만 돈보다 애들하고 같이 보내는 시간이 더 소중한 거 같아요.'


사위가 힘주어 말하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성인이 되고 보니 어려서 부모님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이 너무 좋았다는 생각이 들고요.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았던 기억 밖에 없더라고요. 아이들 시간은 찰나 같아서 금방 지나가 버리고, 그때를 놓치면 아무리 노력해도 그 당시만큼의 효과가 나지 않는 것 같아요. 돈 버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잘 쓰기 위해 버는 것이고, 아이들에게 영양가 있는 시간과 추억을 남겨준다면 저는 결코 아깝지 않습니다, 장인어른. 


아이들 마음을 헤아리는 다정한 아빠를 가진 손자들에 대한 부러움과, 언제나 다음으로 미루고 돈을 더 귀하게 여겼던 아빠 밑에서 자라난 다 큰 내 아이들에 대한 미안함이 동시에 느껴졌던 순간이었다.


핼러윈이나 크리스마스 즈음, 동네 이웃들은 집 안팎을 장식하기 위해 한 달 전부터 온 가족이 모여 꾸미기에 들어간다. 나무 위에 거미줄을 늘어트리고 창문에는 유령그림을 붙인다. 반짝반짝 전구줄을 걸어놓고, 루돌프 사슴도 마당에 세워둔다. 부모들은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동심을 꺼내고, 아이들은 미래에 대한 상상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공유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했던 추억들은 어른이 되고 난 후 언제든 꺼내볼 수 있는 한 권의 소중한 동화책이 될 것이며, 늙어가는 부모에게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지혜로운 부모는 자녀들에게 돈을 물려주기보다 아름다운 추억을 물려준다고 한다. 요즘은 돈 물려주는 것도 쉽지 않은 팍팍한 세상이긴 하지만, 옛날 가난했던 시절에도 부모들은 사느라 바빴고, 부유해졌다는 지금의 시대에도 여전히 부모들은 같은 이유로 바쁘며, 이제는 아이들마저 살아내느라 바쁘다. 자녀들의 동심을 지켜주는 것 또한 부모의 할 일이며, 필요한 것은 경제력의 유무보다 아이들에 대한 깊은 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절약보다 아이들의 정서를 택한 사위가 고마웠다. 굳이 돈의 가치로 환산하자면, 2백만 원짜리 트램펄린은 아이들에게 20억 원만큼의 소중한 추억을 남겨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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