꾀병

쉬고 싶을 때 걸리는 병

아무래도 큰 손자에게 감기를 옮은 것 같다.

약간 머리가 띵하고, 약간 미열이 있고, 약간 으스스하고, 약간 콧물이 난다.

아프려면 제대로 팍 아프던가, 그래야 나 아파! 하고 드러눕기라도 할 텐데.

몸이 아프니 기분도 우울하고, 확 아프지 않으니 답답하고, 약간 아픈 것은 티도 낼 수 없으니 육아와 집안일은 계속 해야하고...

딸네 집을 나오며 결국, 아프기로 했다. 

내일은 좀 쉬어야겠다. 몸이 안 좋아…

딸은 미안한 마음에 얼른, 엄마 푹 쉬어! 말하는데,

내일 나 없이 혼자 손자를 봐야 하는 남편은 어두운 표정이 펴지질 않는다. ‘많이 아퍼?…..‘

집에 오자마자 뜨거운 물주머니 끌어안고 이불 쓰고 누웠다. 이쁜 손자고 뭐고 그냥 한 일주일 아무것도 안 하며 쉬고 싶다.

내 집과 딸네 집을 오가며 두 집 살림을 하고(현직 주부이기에 안 할 수 없고),

씩씩한 두 손자 놈들 뒤치다꺼리하면서(딸과의 약속이라 안 할 수 없고),

저녁에는 온라인으로 남들 다 하는 소극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데(나름의 자아구현이라 포기할 수 없고),

이렇게 적어보니 별로 하는 것도 없어 보이고 간단하건만 사실은 매우 힘들며, 힘들어도 이 중 어느 것을 뺄 수 없다는 사실에 더욱 힘들고 만다.

감기 걸린 손자들은 나를 더 빨리 지치게 한다.

평소보다 열 배의 힘듦이 감기가 다 나을 때까지 이어지고, 이럴 때 나까지 아프면 안 된다는 비장한 긴장이 결국 오늘처럼 꾀병이라도 내고 싶은 심정을 남긴다.

서러울 일도 아니건만 괜히 우울해지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두어 시간 자고 나자 열은 아예 떨어지고, 두통도 씻은 듯 사라졌으며, 몸은 덥고, 콧물마저 자취를 감췄다. 누적된 피로도 없어지고 주책맞게 기운까지 샘솟는다.  

그나마 약간 올라왔던 본 병이 사라졌으니 계속 더 아파하면 백 프로 꾀병이라, 뭐 그렇게까지…

그냥 내일도 딸네 집에 가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