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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랜턴 Jun 11. 2024

가사분담의 원칙, 공정과 공평

늙은 아버지도 얄짤 없다.

평소와 똑같이 딸네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난 뒤의 일이다.

한국에서 오신 바깥사돈까지 해서 그날은 어른이 모두 다섯 명이었다. 여느 때처럼 식사를 끝내고 나는 설거지, 남편은 바닥정리, 사위는 손자들 씻기고, 딸은 내일 가져갈 도시락 네 개를 준비하느라 식사 후에도 모두가 바빴다. 오직 한 사람, 사돈어른만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보며 쉬고 있었다.


설거지를 끝내고 나니 사돈어른은 보이지 않았고 소파는 텅 비어 있었다. 딸은 2층으로 올라갔고, 남편은 담배 하러 나갔는지 거실에 아무도 없었다. 그 사이 아이들을 다 씻기고 나온 사위가 내 옆에 앉더니 진지하게 말한다.

'내일부터는 아버지께 저녁 설거지를 하시라고 할게요.'

내가, 왜? 냐고 물었다.


'그래야 모두가 공평하게 일도 나눠서 하고 쉴 때도 같이 쉴 수 있으니까 그게 좋을 거 같아요.'


사위가 자라온 가정의 분위기를 잠깐 소개하자면, 집안일에 남녀의 구분이 따로 없는 편이었다고 한다.

사돈 내외는 오랜 맞벌이 부부였는데, 누구나 시간 있는 사람이 먼저 요리하고 청소하고 빨래도 하는, 말하자면 가사분담에 성차별이 없는 꽤 열려있는 집안이다. 사위는, 엄마보다 오히려 아빠가 주방에서 밥하고 있는 모습을 더 많이 보고 자랐다고 한다.


한 편으로 열려있으나 다른 한 편으로 여전히 구식인 나는 사위의 제안이 왠지 편하지 않아 떨떠름하니 말했다. 아버지는 식기세척기를 어떻게 쓰는지 모르잖아?


‘가르쳐야죠.'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사위가 대답한다.


사돈어른은 작년에 칠순을 넘기셨고, 건강하신 편이다. 자신의 구십 넘은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느라 오랜 세월 밥 짓고 반찬 만들며 지내다가 부친이 몇 해 전에 돌아가시면서 부엌일에서 다소 가벼워지셨다.

 

딸네 집의 설거지 환경을 덧붙이자면,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사용하는 식기의 모양은 올록볼록 다양하며, 돌아서면 설거지가 나올 만큼 그릇의 사용량도 많다. 재질도 실리콘, 플라스틱, 스테인리스 스틸 등 가지각색이라 일반 가정용 그릇보다 손이 많이 간다. 기름기 많은 프라이팬도 여러 개를 동시에 쓰기도 하고, 우유병에, 도시락에, 물병들까지 씻다 보면 나도 손가락 관절이 아플 때가 여러 번 있었다.


Photo by Rebecca Matthews @ Pixabay

 


칠순을 넘긴 나이라면 필시 관절염이 있을 텐데 공평함을 내세우며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다. 젊은 지들이 조금 더 움직이면 되지 않나 하는 생각과 함께, 모두에게 차별 없이 똑같이 주어져야 하는 공평함도 좋지만, 늙은 아비를 헤아리는 공정함이 빠진 것이 아쉬웠다.

 



오늘은 토요일, 주말인데도 불구하고 딸과 사위가 모두 교육을 가는 바람에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딸네 집에서 손자들을 돌봐야 했다. 저녁이 되어 딸과 사위가 돌아왔고, 우리는 평소처럼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했다. 아침 설거지에 이어 점심 설거지까지 하신 사돈어른이 저녁 설거지를 하려고 싱크에 다가섰다.


내 오지랖은 나의 눈과 직접 연결되어있나 보다. 진종일 육아로 지쳐 나의 몸은 늘어져 있는데, 나의 몹쓸 오지랖이 얼른 나서며 쓸데없이 말한다.

-제가 할게요, 오늘 하루 종일 설거지만 하셨는데, 이건 제가 할게요, 쉬세요.

사돈이 뭐라고 뭐라고 하시더니 웃으며 뒤로 물러나신다.


(늙은이 마음 늙은이가 알지, 늙어보지 않은 니들이 뭘 알것냐!)

나는 옹알이하듯 속으로 중얼거렸고, 설거지를 끝낸 후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에 왔다.

모든 기회는 균등하게 주어져야 하고 공평함을 전제로 해야 하지만, 공정함까지 고려된다면 조금 더 따뜻한 세상이 되지 않을까?


나의 몹쓸 오지랖이 글의 마지막까지 기승을 부린다. 재워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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