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랜턴 Oct 26. 2024

내가 투우장에서 본 것

니들이 왜 거기서 나와

스페인에서 투우경기는 하나의 공연예술이며, 해마다 시준이 열리는 문화적 행사에 해당한다.


말을 타고 싸웠던 중세 투우와 달리 무에르테(투우사)가 맨손으로 소와 싸우는 현대적 의미의 투우경기는, 동물 학대 논란으로 금지하는 추세에도 불구하고 마드리드를 비롯한 스페인 곳곳에서 여전히 경기가 개최되며 관람이 가능하다.


투우는 영화에서만 보는 걸로 알았는데 실제로 경기장에 앉아서 볼 수 있다니!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이색적인 경험에 대한 기대와 설렘으로 찌르르 몸에는 전율이 흘렀고, 가벼운 흥분을 즐기며 투우장으로 향했다.


그러나, 하필 좋다고 잡은 소풍날에 비가 오고, 하필 맛있는 백반집이라 해서 찾아간 날 재료소진으로 일찍 문을 닫는 경우는 비일하고도 비재하다. 특히 내 삶에는 더더욱 그렇다.


소와 사람이 겨루는 경기를 직접 보기 위해 벅찬 발걸음으로 론다 투우장을 찾아왔는데, 매표소 직원은 매정하게도 8월이면 모든 시즌이 끝난다고 말한다. 당시는 9월 하고도 중순, 어찌나 실망스러운지.


그래도 경기장은 볼 수 있다고 해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 본다.


투우장과 투우경기는 내게 항상 신비로움이었지만, 바로 코 앞에서 소와 사람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시합을 못 보게 된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다행이다 싶다. 막상 경기를 봤다면 아마 그 잔인함에 두고두고 후회했을 것 같다.


어쨌든 들어왔으니 일단 둘러보면,  


누런 흙마당을 둘러싼 누런 경기장, 한 마디로 소 색깔 일색이다. 쇠똥 냄새도 나고 소여물 냄새도 나는 것이 소는 없지만 당장 문이 열리며 음메~ 하고 달려 나올 것만 같다. 근거 없는 기대감을 갖고 텅 빈 경기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넓은 마당을 보며 뭔가 마음 구석이 허전한 것은 나만 느끼는 게 아니었나 보다.


빨강과 파란 셔츠를 입은 두 청년이 경기장 안으로 들어오더니 빨간 티셔츠는 투우전사로, 파란 티셔츠는 소가 되어 달려들면서 투우장면을 연출한다. 검정티를 입은 친구는 그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고, 관람석을 거닐던 사람들이 급조된 투우경기를 보고 저마다 피시식 웃었다.


소를 대신하여 그들이 결투한다. 빨간 깃발을 든 자가 투우사, 파란 티셔츠는 소, 검정이 촬영감독이다.


니들이 왜 거기서 싸우냐, 소냐?

 

소를 대신하여 청년들이 결투한다. 객기 어린 투우 장면에 온통 주위가 집중되었고, 빈 경기장을 적적하게 거닐던 관광객들의 빈 마음도 다소 채워진 듯했다. 아! 나도 영상으로 남겨야지.

 

얼른 카메라를 들이댔지만 청년들의 쇼는 이미 끝난 뒤였다.

투우는 시즌이 끝나서 놓치고, 소를 대신한 인간들의 경기는 내 뇌의 느린 회전 때문에 놓쳤다. 우 씨~


하릴없이 셀카만 여러 장 찍고는 경기장으로 내려와 흙마당을 가로질러 뒤편에 있는 우사를 관람한다.

시합에 나가기 전 소들이 대기하는 장소다. 소여물통과 필요한 기구들이 마련되어 있었고, 출전을 하기 위해 소들이 지나가야 하는 좁은 통로도 보였다. 소에게 그 길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경기장으로 내몰린 소는 성과 없이 되돌아갈 수 없다. 인간을 들이받아서 먼저 이기거나, 투우사에게 뿔을 잡히고 쓰러져 목이 부러지거나 둘 중 하나다. 어느 쪽이든 소는 결국 죽임을 당할 것이다. 시즌이 끝난 뒤라 어디에서도 소는 볼 수 없었지만, 소가 없는 그곳에서 소울음이 들리는 듯했다. 살아 움직이는 소의 착한 눈과 마주쳤다면 어땠을까?


투우를 못 본 것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이전 09화 에어비앤비가 호텔보다 좋은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