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쿠바에서 싸우던 날

안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이라고 온전할까?

by 블루랜턴

'추운 겨울에 더운 나라로 여행하기'는 작년에 가졌던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다. 그리고 지난해 연말연시 연휴에 걸쳐 마침내 달성했다. 그러나,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이라고 온전할까?


각자 성향이 달라도 너무 다른 남편과 나는 여행 스타일도 같지 않다. 남편은 대충 보고, 싼 거 먹고, 빨리빨리 다니며 노는 스타일이고, 나는 볼 수 있는 건 최대한 다 보고, 맛있는 현지 음식 먹고, 걸어 다니며 감상하는 스타일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싸움을 피할 수 없다. 결국 한 번 싸웠다. 그나마 한 번으로 줄일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쌓여온 37년 결혼생활의 내공 덕분이었다.




쿠바 여행 일정이 확실하게 정해지자 남편은 무척이나 좋아했다. 출발하기 전 날 밤에는 잠도 설쳤다니, 65세 남성이 아직도 참 순수하다.


크리스마스에 떠나는 해외여행! 솔직히 설레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각자 수영복 하나씩 넣고, 반팔 티셔츠, 반바지에 운동화로 짐을 꾸렸다. 누군가 컵라면과 믹스 커피를 반드시 가져가야 한다는 말에, 컵라면 5개와 믹스 커피도 여러 개 넣고, 가장 중요한 화장실 두루마리 휴지도 하나 챙겼다.


여행사 차량이나 가이드가 함께 하는 여행이 아니므로 얼마 큼을 걸어 다닐 지도 알 수 없다.

당연히 옷 주머니에 지갑을 넣고 다니는 것은 위험할 것이고, 휴지와 물도 갖고 다녀야 했으므로

각자 어깨에 작은 가방 하나씩 둘러매기로 했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이브, 마침내 모든 준비를 마친 우리는 캐리어 하나씩 끌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쿠바의 올드 카 @ Photo by 블루랜턴


쿠바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부터 하바나 시내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애연가인 남편은 제 세상을 만난 듯 아무 데서나 담배를 수시로 피웠고, 나는 허름한 건물과 화려한 올드 카를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 연신 사진을 찍어댔다. 한 장 찍고 또 찍고... 남편은 조금 떨어져서 담배 한 대 피우고 또 피우고...


가는 곳마다 쿠바인들이 시거를 사라, 또는 환전을 하라며 우리에게 접근했다.




시내를 구경하고 어스름 저녁이 되어 호텔로 돌아오는 길, 불빛도 없는 어두운 공원에서 아이들이 공을 차며 놀고 있다. 나는 또 놓칠세라 사진을 찍는다. 찰칵, 찰칵, 찰칵, 찰칵....


남편은 달러를 바꾸라며 접근하는 쿠바 사람에게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으며 계속 걸어가다가, 쿠바인이 내게 다가오기라도 할까 싶어 저만치서 나를 지켜보며 서있다. 눈치가 보인 나는 얼른 카메라를 주머니에 넣고 잰걸음으로 남편을 향해 걸어갔다.


사진 찍느라 시간을 지체하는 나를 아침부터 수도 없이 기다려주고 참았던 남편이 결국엔 버럭 화를 냈다.

'사진을 찍어도 정도껏 해야지! 이렇게 찍고, 요렇게 찍고, 또 찍고 또 찍고....'


나는 나대로, 먼저 가버리는 남편에게 화가 나서 '다씨는' 같이 여행 안 하겠다며 씩씩거렸다. 게다가 담배를 어찌나 피워대는지, 자동차 매연과 콜라보를 이루어 하루종일 매캐한 것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남편이 화난 걸음으로 퍽퍽 걷다가 어두운 공원길 움푹 파인 구덩이에 발을 헛디디며 데구루루 굴렀다. 놀란 남편이 얼른 무릎을 보는데, 벗겨지고 피가 났다.


순간, 남편의 화는 기름을 만난 듯 치솟았고, 타오르던 나의 분노는 물을 끼얹은 듯 피시시... 사그라들면서 미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일어난 남편이 몇 걸음 절뚝거리더니 다행히 정상으로 돌아왔다. 남편이 다쳤으므로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남편은 화가 나고 무릎이 아파서, 나는 미안하고 걱정돼서 그렇게 둘이 말도 없이 쌔한 채 호텔로 돌아왔다.




함께 한 여행 파트너가 나처럼 사진만 찍어댄다면 얼마나 화가 나고 재미없을까! 혼자 하는 여행이 아니니 상대에게 맞출 필요도 있는데....


올드 하바나의 거리는 어딜 가나 모습이 비슷하다. 사진도 웬만큼 찍었으니, 내일은 남편이 하자는 대로 해야겠다 생각하고, 반성하며 잠이 들었다.


다음날부터는 남편이 하자는 대로, 가자는 대로, 먹자는 대로 나는 그저 순순히 따라다녔고, 즐겁게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