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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랜턴 May 14. 2024

나는 오늘도 사기를 당한다.

끝을 봐야 끝인 줄 아는 어리석음

아침에 남편이 발뒤꿈치 굳은살을 벗겨내는 칼을 찾는다. 그런 건 집에 없으니 대신 안전하게 긁어내는 다른 걸로 쓰라 말했고, 남편도 그러마 인정하는 것 같았다.


날씨가 따뜻해서 일찍 걷기로 하고 집을 나서는데, 오늘은 새로운 길로 산책을 가보자 한다. 나는 늘 다니던 안정된 길로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을 좋아하는데, 쉽게 싫증을 내는 남편은 매일 같은 길이 지루하다며 전에부터 계속 주장하던 것이다.


며칠 전 남편이 엉덩이 종기를 앓다가 응급실에 갔었다. 지루한 대기시간 10시간의 기다림을 함께 해주고, 악! 소리 나는 지옥 맛 통증의 수술도 함께 지켜준 후로 우리는 부쩍 살가워졌기에, 이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남편의 청을 친절하게 들어주기로 했다.


차가 많이 다니는 대로변 산책을 싫어하지만, 뭔가 남편이 발견한 새로운 코스가 있겠거니 스스로를 세뇌하며 따라 걷는다. 걷다가 신호등 건널목에서 쉬는 것은 더 싫어하지만,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려 길을 건너고, 삭막한 거리를 지나 나타난 여러 갈림길 앞에서 선택을 어려워하는 남편도 기다려준다.


남편은 길을 정하고 나서도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오늘 처음 오는 길임에 틀림없다. 공장지대가 나타나고 응급구조센터 건물이 보인다. 길은 이어지지 않는 막다른 길이라 돌아 나오게 되어있다. 그제야 남편이 말한다. '길이 없나 봐....'

 

끝까지 가봐야 그 끝을 아나! 


조금씩 내 마음이 비뚤어지기 시작한다.


급기야 남의 공장 건물 안마당을 휙 가로질러야 했고, 그렇게 해서 다른 건물 사이로 나오니 저만치 눈에 익은 주유소가 보였다. 이제 길을 건너 오른쪽으로 가면  동네가 나올 것이고, 왼쪽은 식료품점과 약국, 은행이 있는 상가다. 남편이 왼쪽길로 방향을 튼다. 집은 오른쪽인데?


'아니.. 저기... 달러샵에 가서 그거(발뒤꿈치 밀어내는 칼).... 사야지.'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을 해야지, 이게 무슨 새로운 코스냐고~


애초에 새로운 길이라며 건너편 상가 쪽으로 길을 건너는 게 수상했다.

이렇게 달러샵까지 오고야 마는 끝, 그 끝을 봐야 끝인 줄 아는 나의 어리석음 때문에 오늘도 나는 남편에게 사기를 당한다. 맨날 이런 식이다.


목적을 달성한 남편의 주머니, 나는 오늘도 이렇게 사기를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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