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을 작정하고 단식을 시작했다. 삭발하고 세상을 바꿀 만큼의 영향력도, 딱히 내부에 갈등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다소 생뚱맞기는 했다. 대학생 딸아이의 무심한 제안에 단박에 그러자 대동단결했다. 아이는 조금 더 슬림해지기 위한 것이겠지만 나로서는 불순물이 제거된 공복을 원했던 것 같다. 새해도 됐으니 마음도 몸도 더욱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꽤 괜찮은 제안임은 분명했다.
연말에 헛헛함을 케이크가 달래줬고, 흩어져 있던 가족들 한 데 모였으니 피자와 치킨도 한 데 모았던 성 빠른 응용력이었다. 만기 된 아이의 예탁금을 ETF 식 예금으로 전환하고는 미리 부자 된 마음으로 모퉁이의 햄버거 가게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햄버거를 이쁘게 먹는 방법을 아이로부터 전수받아가며 콜라를 통해 청량감을 만끽한 전적까지.. 도저히 이 팽만감으로는 새해에 미안했던 것이었겠지. 다행히 양심만큼은 정상적으로 작동해서 '이건 아니다' 최후의 통첩이 돼주었다.
첫날은 일상생활에 전혀 문제가 없을 만큼 거뜬했다. 이렇게 해서 독소가 빠지겠어? 싶을 정도였으니까..
둘째 날도 중간중간 물 한잔씩 보충해 가면서 포도맛 나는 보라색 통을 하루 3번 먹어주는 것이다. 점점 속을 비워내면서도 괜찮은데? 대책 없이 여유로웠다. 정오쯤 됐을까, 읽고 있던 책 앞에 노란 해가 보이고 글씨가 흐릿하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기를 두어 차례, 컵을 쥘 수 없을 만큼 손끝이 떨리더니 이번엔 오한이 곰처럼 덮쳐왔다. 3일을 작정했지만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축 늘어지고 말았다.
놀란 아이가 계란을 삶는다. 엄마는 단백질 정도는 보충하면서 하란다. 내 시중을 들만큼 아이는 멀쩡하다. 역시 젊어서 좋다 싶었지만 이게 오히려 아이의 건강을 해칠까 걱정이 됐다. 3일째 되는 날은 아이도 기진맥진이다. 이번에는 내쪽에서 계란, 바나나, 단백질 보충제를 대령한다. 앞으로는 하루만 단식하고 단백질 식단으로 전환하기로 한다. 다소 위험하기는 했지만, 이론을 뒷받침할 근거를 마련했으니 다음은 무리 없겠구나 싶다.
몸무게를 재지 않아도 가볍다. 공복의 느낌이 후련하다. 중간중간 비워내는 일은 필요하겠구나. 벌써부터 다음을 기약할 정도로 고무돼 있다. 평소엔 약간의 운동을 통해서 공기만 전환하는 건식 청소만 하다 오랜만에 호스 대고 구석구석 물청소한 느낌이랄까. 도중에 위기는 있었지만 다 비워내고 가능한 한 가공되지 않은 것으로 채울 생각 하니 새롭다. 외식을 줄이기로 한다. 아이와 이것저것 레시피 보면서 조리하는 즐거움도 꽤나 쏠쏠하다.
생각도 방만해지면 다 쏟아놓고 하나하나 걸러내면 좋겠구나. '안 될 거다' 미리부터 겁먹은 흔적들 지우고, 나쁜 것만 아니면 다 해보자는 마음을 갖는다. 기다렸다는 듯 작년에 그만둔 직장에서 연락이 왔다. 일은 괜찮게 했나 보네 위안은 잠시, 며칠을 고민했다. 당장 내 유지비로는 도움이 되겠지만, 분명 그만둔 이유가 있었을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고사하려는 이유가 내 자존심만 지키려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쉬고 있는 편안함에 길들여진 건 아닌지 돌아보게도 했다. 지금도 불경기에 수락했어야 맞았나? 싶지만 어떤 선택의 끝에도 미련은 따른다. 다만, 고갈되지 않으려는 내 선택을 존중하기로 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탈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