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비약을 담아 놓은 구급함이 부서진 지 오래다. 교체해 줘야지 하면서도 당장 급하지 않다는 것으로 내일모레 하다가 아예 다음으로 밀려나 있었다. 내부가 2단으로 접히게 돼 있어서 많은 양을 용도에 맞게 배열하기가 좋았다. 플라스틱 재질로 선반에서 내리쳐진 바람에 열고 닫는 이음새 부분이 길게 금이 간 형태로 깨져버렸던 것이다. 이번에는 깨지지 않아야 된다는 기준을 앞세워 여행용 가방처럼 생긴 폴리 소재로 했다. 접이식이 될 수 없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서 사방 벽 쪽으로 그물망이 주머니처럼 둘러 있어서 수납공간을 대신했다.
내친김에 내용물을 쏟아서 유통기한이 지난 것들과 유효한 것들을 구분해서 옮겨 담았다. 5분에 1 정도만 남기고 다 버려야 했다. 처방받았던 것조차 중복돼서 개봉도 하지 않은 채 날짜가 지나서 버려지는 것도 많았다. 옷과 음식만 과소비가 아니라 당장 쓰지 않아도 구비해 놓으면 안심된다는 명목으로 사다 모은 상비약들이 더 문제란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곳에서는 진통제 한 알이 없어서 사경을 헤맨다는데 낭비를 떠나서 남용이었다. 병원도 약국도 가깝고, 코 앞 편의점까지 기본적인 것은 갖추고 있는 마당에 뭐 그리 준비성이 투철해서 사재기가 됐을까. 부끄러웠다. 이럴 땐 유비무환이 굴레가 된다. 부족함만 못하다.
저녁 준비하다가 프라이팬 손잡이를 너무 가깝게 잡은 바람에 검지 손가락 위쪽으로 물집이 잡혔다. 당장 화상 연고를 사 오겠다고 하는 것을 지금 발랐고, 상태도 심하지 않다고 가까스로 막았다. "제발 찾아보고 합시다. 집에다 약국 차리지 맙시다" 했다. 아이가 피곤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이모부 서랍을 털어와야 한다고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싱크대 오른쪽 위아래 서랍을 각종 영양제와 상비약으로 채워 놓고 뿌듯해하던 것을 집들이 때 보고 와서다. 모두가 이렇지는 않겠지만 알게 모르게 각 가정에 비치된 의약품들도 만만치 않을 것 같다.
무소유가 불필요한 것을 지니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필요한 것도 필요한 만큼만 갖는다는 것도 모를 리 없다. 준비하고 누적시켜야 할 것은 약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단련시키는 일일 것이다. 기왕 시작했으니 이 방 저 방 불필요한 것들도 함께 내칠 참이다. 마음의 부기를 빼는 데는 이만한 명약이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