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게 나는…
유독 헤어짐에 취약한 엄마와 헤어지고 돌아왔다. 같이 했던 스무 해를 빼고도 햇수로 말하면 일흔여섯 번째, 공식적으로는 일 년에 두 번이니 152번의 헤어짐이다. 가끔 비공식적일 때도 있으니 삼분의 일만 더한데도 180번가량을 헤어져 온 셈이다. 차 뒤꽁무니가 아주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드시는 엄마의 모습을 뒤로하고 올 때면, 내가 참 못된 남자 친구만 같다. "하루만 더 있다 가라" 애원에도 일방적으로 헤어짐을 통보하고 돌아와서는, 언니에게 전화해서 "엄마 괜찮아?" 못 이긴 척 안부를 묻는 기피대상 1호 남자 친구..
올망졸망 주는 것은 트렁크도 모자라 뒷좌석까지, 무게 중심 따져가며 차곡차곡 싣는다. 체면치레는 거추장스러운 것, 어디 빠진 것 없나 가재눈으로 훑어본다. 반려되는 품목 없이 다 받아 챙긴 다음 "잘 있어" 엷은 미소까지 머금고 돌아서는.. 와~ 천하의 재수 없는 캐릭터가 나였구나! 아쉬울 때는 언제 헤어졌나 싶게 안면 몰수 하고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세상 질 나쁜 남자 친구 말이다.
그것도 모자라 새벽녘에 불현듯 떠오른 게 있었으니.. 다 챙겨 온 줄 알았는데 호박을 안 챙겨 왔네? 거실에 덩그러니 있던 잘 익은 호박에 후광이 비친다. 치명적인 실수다. 한두 번 해 본 것도 아닌데 그 걸 놓치다니 예전 테크닉이 아닌 한물 간 타짜처럼 탄식한다. 깜빡 잊고 주고 오지 못한 것은 없나 점검하기는커녕 챙겨 올 것에만 혈안이 돼 있다. 민망함을 대신해 금방 올게, 전화 자주 할게 지킨 적 없는 말만 주절댄다. 본래의 목적이 '호박'인 것처럼 그것을 위해 가까운 날에 돌아갈 방도를 모색하는 사기캐 남자 친구.
기억을 잃어가도 시금치를 다듬고, 무를 손질해서는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가져가게 하려고 애쓰시는 것은 여전하다. 이제는 언니가 그 뒤를 이어서 엄마의 마음을 대신한다. 엄마의 기억까지도 대신 모아가며 제대로 된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언니에게까지 참 한심한 모습만 보일 뿐이다. 시골에 있는 모든 것은 공짜 같아서 엄마의 마음, 언니의 마음까지 당연히 받아도 되는 공짜로 여겨왔다. 삭는 줄 모르고 마냥 퍼다 써도 되는 샘물인 줄만 알았다.
일말의 양심은 있는 걸까? 다녀온 며칠은 목이 뻐근해 왔다. 그때마다 이 짓 그만해야지. 못 할 짓이다. 개과천선을 꿈꾸기도 한다. 베란다에 던져 놓은 시금치가 노랗게 새지 않게 하나하나 씻고 데친다. 무는 채쳐서 생채를 하고 배추는 레시피에 의지해 백김치에 도전한다. 하나라도 허실 없이 처리하는 게 그나마 돌아갈 명분이 생기는 것이다. 그 사람만이 내게 적합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럴 때만 머리 좋은 남자 친구의 횡보다. 그리고 돌아갈 핑곗거리 호박이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