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보르기니'의 뒷모습

by 김하정

주말, 늦은 점심을 먹고 아직은 습도 높은 낮 시간을 피할 겸 호수 주변이나 둘러보기로 했습니다.

모퉁이 쪽 외진 곳에 웬 문화센터일까 전부터 궁금했던 차에 이번엔 작정하고 들어가 봅니다.

2층 도서관의 전망을 즐기다 3층으로 올라갑니다.

마침 단독 사진전과 회화 부문 청년작가전이 동시에 열리고 있었습니다.

사진전은 드론을 띄워 촬영했을 법한 내려다 본 호수 풍경이 대부분이었고

유화 캔버스 위에 실사돼서 세밀화처럼 보였습니다.

색다른 느낌은 색다른 접근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되는 샘입니다.

회화 부문은 전부 아크릴화로 구성돼 있어서 전체적으로 밝고 투명했습니다.

빨리 마르는 장점이 있어 많이들 선호하구나 흐름을 알 수 있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유화를 더 선호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취향일 뿐이라서

재료만 다를 뿐 그림은 그리는 것도 보는 것도 설레기는 마찬가지란 생각이 듭니다

물러섰다가 다가서기를 반복하면서 천천히 둘러보는 중에 람보르기니 뒷부분을 그린 그림 앞에 섰습니다.

여기저기 녹슬고 깨지고 부서진 가장 피하고 싶은 그림이기도 했습니다.

기법을 떠나서 부서지고 깨지고를 거쳐와서인지 더는 깨지고 싶지 않다는 건지, 이제부터는 부드러운 것,

곡선인 것, 잔잔한 것에 더 눈이 가는지라 그 마음이 투영됐던 것도 같습니다.

앞부분 그림은 전시 이전에 팔렸다고도 했습니다.

아무리 고급차도 부서지면 본래의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건지, 부서져도 근본은 람보르기니라서

화려했던 왕년을 들먹이며 가장 찌질하게 뻐겨보고 싶은 건지 작가의 의도는 알 수 없기도 하고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는 온전히 보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서로를 왜곡하고 내 식대로 오해하고 사는 것처럼 그게 삶의 일부이기도 해서

특별히 억울하지도 해명하고 싶은 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작가의 손을 떠난 그림은 오로지 관람자의 해석에 따를 뿐입니다. 그것을 보편인 것처럼 공론화하지만

않으면 된다는 생각입니다.

시간의 흐름 따라 마모된 것이라면 지우개처럼 소멸까지의 우리의 삶을 얘기하는 것일 수 있고,

외부의 압력으로 인한 상처라면 얘기가 또 달라져서 겉보기는 람보르기니지만 마음은 치유받아야 할

상처투성이 개똥벌레일 수도 있겠지요.

이렇게 말하면 마치 사고 현장에 투입된 프로파일러 같지만 그림은 분석하는 게 아니라 처음에 다가온

그 느낌이 가장 유력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중국집 메뉴판을 휘둘러보고 결국에는 자장면을 고르듯 처음 마음에 준해서 다시 보게 됩니다.

확실한 건 람보르기니로 살기도 우여곡절 애로사항이 많았겠다 싶습니다.

화려한 명성 탓에 수수함이 용납되지 않는 메릴린 먼로, 마이클 잭슨 같습니다.

결국은 사람들이 각인시킨 모습으로 사느라 맘에 들지 않는 주인을 태우고 표준 속도를 훌쩍 넘어

폭주를 일삼았을 거고, 나서기 싫은데 나서야 했을 것 같고 그 끝에 여기저기 삐걱대기 시작했겠지요.

다 소진돼서는 폐차장 한쪽에 박혀 그나마 쓸만한 부분은 옜다 다 가져가라 하면서 쓰일 데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여기며 본래의 고철 덩어리로 돌아가겠지요.

그래도 한세상 폼 나게 살아봤으니 그것으로 됐다 여기면 좋겠습니다.

화려해도 화려하지 않아도 저마다의 쓸쓸함은 있을 테고 떠넘길 수 없는 자기 몫이다 싶습니다.

결국 가장 피하고 싶었던 그림 앞에서 가장 오래 머물게 됐던 것은 우리가 거쳐온 시간과 거쳐갈 시간이

투영된 까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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