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는 결혼생활과 연동되는 골동품들이 많습니다.
간혹 10년 단위로 교체된 것도 있지만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 게 대부분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시간을 같이 한 냉장고에 애착이 많았습니다.
모델명 GR52-2JD, 516L 사용법 문의에 삐삐 번호가 적혀 있어 아이들의 놀림감이었습니다.
위아래로 냉동. 냉장실로 나뉜 2도어식, 크림색 몸체에 짙은 브라운색 손잡이가 예뻤습니다.
열고 닫기를 가장 많이 해선지 곡선으로 된 그립감이 손에 익어 특히 좋았습니다.
별다른 고장도 없이 잘 지내다 올 7월이 되면서 문을 닫아도 밀착되지 않고
이 빠진 할머니 발음 새나가듯 찬 기운이 솔솔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아쉬움에 애써 못 본 척하다가 이제는 보내줘야겠구나 마음먹기 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렸습니다.
'그만큼 부려 먹었으면 됐지, 이제는 보내줄 줄도 알아야지'환청이 들렸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냉장실 문 내부가 부서진 부분도 있어서 세월을 실감하곤 했었습니다.
만 28년 6개월, 우리 아이들의 어린 시절 해열제를 상주시켰고. 사춘기에 갈증을 달래줬고, 때로는
애꿎은 분풀이 감으로 뒤 발로 채이기도 하면서 갱년기의 온도 변화를 발 빠르게 감지해 준 우리 집 보모였습니다.
이사도 몇 번 거쳤지만 늘 의연했습니다.
긴 시간 가족의 먹거리를 신선하게 지키면서 상한 마음까지 달래줬던 시간들.
늦은 퇴근에 뭐 해 먹지? 한숨 폭 쉬면 두부 계란 있잖아 풋고추 된장 있고. 시골에서 보내 준 오이 호박 많은데
뭐 걱정이야. 뚝딱 차려먹고 기운 나게 해줬지. 고맙다. 고생 많았다.
배달 기사님이 도착하기 전에 손잡이도 만져 보고 아름드리나무를 품듯 안아도 봤습니다.
앞모습 옆모습 사진도 찍으면서 내 나름의 이별의식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얼음 얼린 냉각기라도, 계란 놓는 받침대라도 빼놓을 걸 그랬다 보내놓고도 후회만 있었습니다.
사람 빈자리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새 냉장고에 마음이 가질 않았습니다.
4도어에 수용공간이 많아 편리하긴 하겠다만 곡선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덩치 큰 네모로만 보였습니다.
손잡이가 홈으로 되어있어 외간은 깔끔한데 심심했습니다.
앞 면과 옆 면 색상이 달랐습니다. 그것도 결격 사유처럼 자꾸 단점을 찾고 있었습니다.
내용물만 옮겨놨을 뿐 조목조목 정리할 맘이 생기질 않았습니다.
이러지 말자. 선선하게 보내주고 또 익숙해가고 용도별로 정리하면서 대신 많이 쟁이지는 말자. 했습니다.
'너도 선배 냉장고처럼 남은 시간 오래 같이 길들어 가보자' 쓰다듬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