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한 나와 마주하는 시간
오랜 시간 동안 일기를 써오며 한 가지를 깨달았다. 사람은 의외로, 자신이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명확히 말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기쁘거나 슬픈 일이 분명한 상황이라면 덜할지 몰라도, 대개의 감정은 그보다 복잡하고 혼재되어 있다. 언어는 늘 그 복잡함을 따라가지 못하고 감정은 늘 언어보다 먼저 지나간다. 감정을 설명하지 못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너무 작거나, 너무 커서일지도 모른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546개의 일기를 작은 공책에 적어내려 갔다. 언젠가 다시 돌아오는 날이 온다면 그 일기들을 하나씩 읽어보며 그날의 감정을 떠올리고 잊지 않으려 되새겨야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아니, 한 적이 있었다. 이미 접은 지 시간이 많이 흐른 결심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 누구도 보지 않는 공책에 적힌 내 감정은 과도하게 적나라했다.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짙은 농도를 가진 감정이 글자를 따라 흐르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절대 보여줄 수 없는, 나조차도 다시 보기가 힘든 그런 날들이었다. 지옥이 있다면 이런 거겠지.
마지막 관문이 남긴 했지만 이 정도면 지옥을 등지고 낙원을 바라보고 있다고 할 수 있는 시간에 도착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많은 걸 잃었다. 얻은 거라고 하면 마음의 병과 인간에 대한 증오. 이 두 가지가 유일하다. 그런 와중에도 아직 온기를 건네주는 사람들이 있기에 삶은 이어지고 있다. 모든 걸 적으로 돌린다고 해도 예외로 두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삶. 아직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고 보기는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몇 달 만에 푹 자고 일어나 오랜만에 시장에 갔었다. 목요일마다 오는 집 앞의 작은 시장이다. 은근히 있을 건 다 있는, 속초나 강릉의 중앙시장 축소판 정도인 시장이다. 현금을 쓰는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일면식도 없지만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네고 물건을 주고받는 그들 사이에서 나도 오래간만에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음 편히 웃어본 게 얼마나 됐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카드가 아닌 지폐로 물건들을 사고 동네를 거닐다 보니 2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오직 나만. 나만 변했다. 내가 변하지 않았다면 잃어버린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아도 됐을까. 빼앗긴 걸 빼앗기지 않아도 됐을까.
의미 없는 가정이다. 시간은 기억을 형성해 가고 기억은 사람을 구성해 간다. 나는 어제로 돌아갈 수 없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는 다른 사람이니까. 짙은 안개처럼 사방을 에워싸던 것들이 서서히 옅어져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심연에 둘러싸였던 과거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그래도 조금의 희망은 보았다. 도저히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이 기분도 끝을 향해 가며 점차 나아지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난 나의 운명이 아닌 길에 오르려 했고,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고 애써왔다. 그래서 이렇게 된 거다. 그뿐이다. 지옥 같았던 이 시간 속에서 내가 유일하게 얻어낸 것은 어떤 길이 나의 길이 아닌지 알아차리는 것뿐이었다. 그걸 받아들이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내가 원했던 건 가장 평범한 것들이었으니까. 인간의 유전체에 깊이 각인된 본능에 가까운 사랑과 평화였으니까. 그걸 부정하고 그 대가를 짊어지는 것은 상상 이상의 고통이었다.
동이 트면 난 비로소 나의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 어둠으로 다른 무언가를 밝혀줄 수는 없어도 품어줄 수는 있겠지. 어둠이 바다를 이룰지라도, 하늘이 밤에 침식되어 빛을 잃었다고 해도, 은하수는 영원히 빛나야만 하는 거다. 생명은 찬란한 것이니까. 어둠에 무너져서는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