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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교사 단상

2024년 마지막 날, 받아 든 통보

20250208 END FOR AND

by 그린플러그

오늘은 2024년 마지막 날이다. 한 해의 마무리를 어떻게 할까 궁금했는데 오늘 날아든 통보로 깔끔하게 정리하고 눈물 찔끔 짜는 마지막 날을 보내는 중이다.



2024년이 시작되던 날부터 박제해 두었던 인스타 바이오 마지막 문장

'20250228 END FOR AND'



"나라에 예산은 없고, 명퇴를 쓴 사람은 많아서 선생님은 안될 것 같은데... 내년에 학년부장 해보는 거 어때요?"

같이 명예퇴직을 내신 다른 선생님들께서도 이번에는 많이 안된다는 소문이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교감선생님마저 저렇게 말씀하신다.


실은 나도 거의 마음을 접고 있던 차였다. 그럼에도 12월 30일 종업식을 준비하는 마음이 참 어수선했다. 어찌 될지 모르는 내 운명에 대한 염려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쩌면 교직생활 마지막 인연이 될 어린이들과 마무리를 잘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다. 특히, 종업식 3일 전부터 우리 반 어린이들을 볼 때마다 왜 이렇게 애틋해지던지. 잘 헤어지고 싶은 마음에 뭐라도 더 해주고 싶었다. 선물보다는 손 편지를 좋아하는 내가 선택한 방법은 교직생활 처음으로 만들어보는 담임상장. 매번 4시 30분이면 칼퇴근을 하던 나는 금요일 퇴근 시각 이후 약 1시간 30분을 더 컴퓨터 앞에 머물렀다.


사족으로 우리 반 어린이들을 자랑하자면, 큐브부터 보드게임까지 엄청난 게임의 고수 ㄱ, 옷도, 머리도 늘 맵시 있게 차려입는 데다 책상 주변부터 사물함 정리까지 정말 완벽한 ㅎ, 정시에 온 날이 손꼽을 정도로 적은 지각쟁이지만 교과서 외 다른 수학 퀴즈 문제를 풀 때면 어느 누구보다 풀이를 빨리 해내는 ㅇ, 가위질, 풀질, 종이접기 솜씨는 무척 어눌하지만 논리적인 사고력은 누구보다 뛰어난 ㅈ, 그림을 그릴 때면 상황 묘사를 정말 디테일하게 잘했던, 감성적인 스케치, 색감 솜씨에 늘 날 감탄시켰던 ㅂ(다른 어린이들은 기교가 뛰어난 ㄱ의 그림을 더 좋아했지만 나는 ㅂ의 그림이 더 마음에 들었다), 어린이시를 쓸 때도 놀라운 표현력으로 날 감탄시키더니 이어지는 뒷이야기를 상상해 내는 활동에서는 어떤 주저함도 없이 다채로운 이야기를 쏟아내던 또 다른 ㅂ, 어느 날부터 스티커, 포카, 간식 등을 예쁘게 포장해서 친구들과 선물 주고받기 놀이를 하던, 선물을 받은 친구들이 자기 선물을 보고 기뻐하고 좋아하는 표정을 보는 게 좋아서 받는 것보다는 주는 게 더 기뻐서 한다더니 어느새 나에게까지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포장한 선물을 주던 ㄱ(두세 차례 받고 난 후 너무 부담스럽지는 않게 예쁜 머리핀, 스티커 등을 포장해 주었다. 다음날 바로 머리핀을 꽂고 온 센스! 아, 이게 주는 기쁨이구나! 나에게도 그런 기쁨을 선물해 줘서 고마워, ㄱ), 3월 2일 첫날 버스 놓쳐 지각했다가 교실을 못 찾아서 엉엉 울고, 학년초에도 발표할 때면 긴장해서 늘 눈물 찔끔하고 울먹울먹 했는데 어느새 씩씩하게 스스로 손을 번쩍 들고 발표하던 다른 ㄱ, 점심시간에는 오이시쿠 나래*2 노래하면서 친구들과 정다운 식사 분위기를 만들고, 강당에서 놀이활동 할 때엔 함께 하는 팀원들을 동그랗게 모으고는 "우리 다 열심히 하자, 하나, 둘, 셋, 파이팅!" 하고 서로를 응원하는 분위기를 만들던, 갈등보다는 평화 모드를 사랑하는 ㅇ, 학년초엔 글자를 못 읽는다며 책읽기 활동을 그냥 넘기려 하더니 자기도 읽고 싶어졌는지 어느새 '스스로' 글자를 떼고는 (조금은 어색한 발음도 있지만) 자신 있게 글을 읽는, 아직은 조금 어색하게 글자를 쓰는 엄청난 노력가 ㅁ, ...


쓰면서 펑펑 울고 있다 ㅠ 이렇게 하나하나 예쁘고 다정한 행동을 하는 어린이들을 만나 행복한 한 해를 보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렇게나 귀하고 예쁜 어린이들이랑 함께 하면서도 나는 듣기 싫은 잔소리 설교를 많이 했다니!



내 마음이 아직 우리 반 어린이들과 헤어지지 않았던 그때, 명예퇴직이 되지 않을 것이 뻔하니 내년에 학년부장 하라는 교감선생님의 협상이 들어왔다. 일부라도 만나고 싶은 마음에 3학년 부장을 하고 싶다고 희망서를 썼다. 그렇게 명예퇴직에 대한 마음을 거의 비우고, 이번에 지정된 행복학교에서 3학년 부장이 되면 하고 싶은 일을 생각했다. 3학년 특색 사업으로 어린이글을 편집해서 펴낸 책으로 우리끼리 출판기념회를 가져보는 건 어떨까, 현장학습도 가까운 곳으로 가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 보자며 동학년 선생님들과 협의해 보고 싶다와 같은.



그렇게 마음은 이미 학교와 어린이들에 묶여버렸던 오늘, 그 어떤 예고장도 없이 갑자기 '명예퇴직 확정 대상자'라는 통보를 받아 들었다. 시원하리라 생각했는데, 마냥 시원하지만은 않다. 어제 졸업을 하고는 학교 떠나기 싫다며 엉엉 울며 찾아온 작년 어린이 두 명이 내년에는 정말로 선생님은 더 이상 선생님이 아닌 거냐 묻기에 내 운명은 나도 모른다고 이야기했는데. 정말 몰랐다, 이렇게 덜컥 2월 28일이 마지막이라는 발표를 정말로 받아 들 줄이야.



2003년부터 시작된 교직 생활은 인스타 바이오에 적어둔 것처럼 2025년 2월 28일이면 마무리가 된다. 실은 많이 두렵다. 이 일을 그만두고 무엇을 할지 생각해 둔 것도 딱히 없다. 그럼에도 그저 언제가 끝이 될지 모르는 이 삶에서 '그때 그렇게 할 걸' 하는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았다. 대책 없는 퇴사는 절대로 멋도, 용기도 아니라지만 그 결정이 멋이 되게도, 용기가 되게도 할 수는 있다. 그 결정 이후 뒤이은 나의 선택과 행동으로.


이제 앞으로 남은 두 달간의 마지막 겨울방학에는 내 마음을 직면해 볼 예정이다. 두렵다면 두려운 이유를 직면하고, 그것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려고 한다. 또한, 죽기 전에 정말 해보고 싶은 일을 찾아보아야지. 이 결정이 그 누구도 아닌 내 마음에 들 수 있도록.




이제 내 인스타 바이오는

20250301 AND FOR... 로 잠시 바꿔두어야겠다.



진짜 사족,

어학연수휴직, 유학휴직, 자율연수휴직까지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 앞서 단 한 번의 예외도 없이 두려워하고 잘한 결정이었나 돌이켜봤던 나였기에 이번도 그런 과정의 일환이지 않을까. 이전에 경험해 두길 잘했다.



IMG_6964.jpeg 마지막 널찍해서 좋았던 내 책상
IMG_6966.jpeg 마지막 교실, 진짜 기분 이상해.


IMG_6960.jpeg 미리 알았다면 진작에 나눔 했을 물건들인데 연구실에 남겨두고 갑니다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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