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학급에서 만난 학생들 이야기
가고 싶고,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부터 시간이 될지 조바심이 났다. 되도록 학교 업무 인수인계도 꼼꼼하게 마무리하고, 교실도 말끔히 정리하고, 차도 잘 팔아넘기고 졸업식에 갈 수만 있다면 좋겠는데, 주어진 시간이 충분할지 가늠이 안 되었다.
나를 만나든 스치든 관계 맺은 학생들을 돌이켜 생각하면 아쉬움과 미안함이 더 커진다. 내가 몰라서 못 했거나 한발 먼저 더 다가가지 못하고 거기까지였던 내 엉거주춤이 떠오르고, 그때는 맞다고 여겼던 언행이 부끄러운 죄가 되기도 하여 직시하는 게 불편하기도 하다. 그냥,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다고 적당히 나를 다독일 날이 올 수 있을까. 그래도 될까.
서원이를 보러 가는 맘은 분주하였다. 졸업식에 들른 옷차림이 공항 패션이라 미안하기도 했고, 경황이 없다며 간단한 카드 하나 못 쓴 축하가 서원이를 위한 것인지 내 안위를 위한 것인지 자신할 수 없었다. 서원이가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란 질문은 우리의 시간을 기억하고 그의 맘에도 내가 자리하고 있는지에 대한 대답이라 여기니 그의 반응이 못내 궁금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껌 하나도 받지 않는 내가 가장 힘들어할 때 들에서 꺾어온 귀한 꽃다발을 살며시 건네주셨고, 바쁜 아침에 서원이 먼저 말끔하게 따뜻하게 챙겨 입히고 오셨던 어머니께 어머니를 닮은 꽃다발과 스카프를 건네고 싶었다. 어머니는 매일 아침 서원이 뿐만 아니라 서원이가 함께한 반 친구들과 선생님들을 위해 기도하며 운전을 하셨다. 서원이랑 공부하면서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나마 다행으로 지내온 것은 서원이 어머니의 기도 덕분이기도 하다. 서원이에게 졸업을 축하하는 마음보다 어머니께 선물을 드릴 기회라는 데에 마음이 쏠렸다.
특수학교 구조는 미음(ㅁ) 구조이다. 외부인에게는 폐쇄적이고, 학생들에게는 교실을 이탈하거나 배회해도 학교 밖을 벗어나지 못하는 구조이다. 실사나 협의로 출장을 가도 안내 화살표가 없으면 늘 헤매곤 하는데, 졸업 장소에 대한 안내가 없어서 더욱 나만 낯선 방문객같았다. 현관문을 들어서다 돌아가서 정문에서 안내하시는 분께 위치를 물어 갔다.
강당에 들어가자마자 마침 큰 화면에 서원이 반 졸업생 사진이 나왔다. 정서원(3-2) ‘아, 졸업하는구나!’ 앞에 앉은 졸업생 사이에서 서원이 뒤통수를 찾는데, “선.생.님!!”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고개를 돌려보니 서원이 어머니께서 내가 들어서는 걸 보자마자 알아보시고 외치신다. 약속도 없이 불쑥 찾아온 나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신다. 덥석 손을 잡고 눈을 마주 보니 12년을 등하교 동행한 어머니 앞에서 내가 뭐라고 눈물이 차오른다.
서원이는 일반 초등학교의 특수학급을 졸업했다. 중학교부터 특수학교에 다녔고 고등학교 졸업을 하면 온종일 집 생활을 한다. 직업교육을 하는 전공과에 진학하지 못했고, 복지관이든 사설 기관이든 마땅한 맞춤형 시스템이 없다. 12년의 공교육을 받았으나, 인생에서 고작 12년이 국가의 지원이었고 이제는 오롯이 가정의 몫이 된다.
송사 답사에 '이 졸업식이 끝나면 넓은 바다로 나아가고 사회에서 귀한 사람으로 살리라'는 내용이 헛헛하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전공과가 한 울타리에 있는 특수학교의 한 날 한시에 하는 졸업이어서 급별로 졸업생 얼굴을 담은 특별 영상이 나왔다. 그 긴 영상에서도 서원이는 없다. 저 영상을 만들 때 서원이가 아파서 결석을 하였을까, 아니면 서원이가 뚜렷하게 졸업 소감을 말하지 못해 빠진 걸까. 이래도 서운하고 저래도 화가 난다. 서원이는 이 졸업식에서도 사회에서도 주인공이 못되는 대우에 억울한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나는 서원이를 4학년 때 만나서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함께했다. 12년 중의 3년을 함께한 나는 특수교사로서 서원이 인생에서 무엇을 하였고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나는 내 생을 살겠다고 14시간을 비행하여 캐나다에 가는데, 서원이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보기도 없고 서원이의 컨디션에 맞는 지원도 전무하다. 내가 더 정치적이지 못한 게 아주 부끄럽고 미안하다.
나는 시골에서 특수교사인 나만 오롯이 바라보는 학생 보호자들의 바람과 시선이 부담스러워, 그나마 지역사회의 네트워킹이 있고 전문가들이 협업할 수 있는 도시로 인사이동을 하였다. 치료사, 방과 후 교사, 사회복지사, 의사, 활동지원사, 경찰 등 전문가들이 협력할 수 있는 도청소재지로 근무지를 옮기면서 내 어깨의 무게가 공동의 무게로 나누어지니까 내가 숨을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거 같다.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학생이나 나와 결이 다른 학생을 만나면 우리의 관계가 꼬이더라도 세상은 복잡하고 다양하니까 각자에게 경험이고 그게 인생이라고 여겼다. 그때 맡은 반에서 만난 서원이는 여전히 내 안에서 거울로 남아 내 속내를 들여다보게 한다.
졸업식이 끝나고 강당에서 나와 교실로 돌아가는 무리 사이에서 서원이를 보았다. 서원이도 출입구 한쪽에 비켜 서 있는 나를 보았다. 갑자기 서원이가 눈이 커지더니 나에게 돌아섰고, 사람들이 나가려고 밀치는데 그 무리를 비집고 나에게 와서 덥석 안았다. 내 어깨 위로 두 팔을 휘감고 두 발을 들어 내 다리를 감싸고서는 “좋다!”, “안녕하세요!”, “선생님”이라고 말한다. 꼬옥 안아주었더니, 옆에 있던 아버지는 뒤돌아 눈물을 훔치신다. “서원아, 졸업 축하해. 이거 엄마한테 드리자. ‘엄마, 고마워요~’하면서 드리자.” 해도 보조선생님을 따라 뒤돌아 교실에 가버린다.
어머니는 본인이 만들었다며 팥팩을 건네신다. 담임 선생님 드려야지 저를 주시냐 하니, 늘 한결같은 대답, 넉넉히 만들었단다. 추운 나라에 가면 어깨도 아플 텐데,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따뜻하게 잘 지내라고 기어이 손에 쥐여주신다. 서원이를 안으면서 구겨졌던 꽃다발을 건넸다. 내가 건네는 건 다 돈으로 금세 산 것들이라 민망하다. 기차 타고 공항 가는 길에서야 다 못 전한 마음을 풀어 놓느라 문자를 보냈다. 1년 짧으니까 곧 다시 뵙자고, 그때 만나면 서원이가 좋아하는 바지락 해물 칼국수를 먹자고 하였는데, 서원이와 어머니께서 가정에서 보낼 1년과 어학연수 휴직한 나의 1년은 다른 속도일 거 같아서 또 아차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