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망보다 꽃차와 유리다기
일요일이다. 큰 아이와 함께 카페에 가기로 했다. 큰아이는 공부를 하고, 나는 글을 쓴다. 주말에 집에 있으면 글이 써지지 않으니 아이와 함께 집을 나선다. 혼자 외롭게 공부하는 아이를 응원하는 마음이기도 하다. 아이도 엄마와 함께 카페에 가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 심심하지 않고, 엄마가 음료며 케이크이며 계산해 주니 용돈을 아낄 수도 있다. 이럴 때는 "가보지 않았던 카페를 가보자"라고 의기투합한다. 집 주변에 있는 대부분의 카페들을 가봐서 한참 찾아야 했다. 갑자기 최근에 생긴 전통찻집이 생각났다. 주위에 전통찻집이 있기는 하지만 구식인 듯하여 가보지 않았었다. 후기를 뒤져보니 이곳은 인테리어도 깔끔한 듯했다. 아이도 "오! 좋다, 거기 가보자"한다. 이럴 때는 마음이 딱딱 맞는다.
5층에 있는 카페라 전망이 좋았다. 강가에 떠있는 연잎들이 내려다보이는 카페였다. 하지만 나는 이런 전망은 익숙하다. 너무 자주 봐서 그러려니 한다. 차라리 전통차가 더 신기했다. 애기설국차를 주문했다. 유리로 된 다기 세트에 아름다운 색깔의 꽃들이 담겨 있다. 유리로 된 다기는 처음 봤다. 유리로 된 주전자, 유리로 된 걸러내는 그릇(정확한 이름을 모르겠다), 유리로 된 찻잔들이 귀엽고도 신기해 이리저리 살펴봤다. 유리 찻잔에 담겨 있으니 우러난 꽃차의 색이 더 그윽해 보였다. 차를 맛봤다. 음, 좋은데 하는 말이 절로 나왔다. 다도를 배워볼까 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차를 좋아하는 아이도 "배워 봐 배워 봐"한다. 다기 세트만 잔뜩 사놓고 귀찮아지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차를 마셨다. 차를 우려 마시면서 각자 할 일을 했다.
거기 가봤자 볼 것 하나도 없는데
옆 테이블에 한 커플이 앉았다. 전망이 좋다고 난리가 났다. 옆자리라 말소리가 다 들렸다. 남자가 자기 집에 다기가 있다고 하니 여자가 집에 놀러 가보고 싶다고 말한다. 앗 용감한데 하며 듣고 있으니 남자가 버벅거리면서 그래 놀러 와한다. 연인이 될까 말까 하는 사이의 밀당이 느껴졌다. 아직은 친구인가 보다. 전망이 좋다, 저 멀리까지 다 보인다며 한참 이야기를 나눈다. 나는 '그래, 여기 전망이 좋기는 하지, 그리고 그때는 모든 게 다 좋아 보여. 그때가 좋은 때지' 생각했다. 조금은 민망한 이야기들까지 들리기 시작해 이어폰을 꽂았는데, 갑자기 이어폰을 뚫고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주변에 물의 정원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가 그렇게 좋데. 다음에는 거기 가볼까?"
앗, 내가 아는 곳이다. 그러니 막 알려주고 싶어 진다. '거기 가봤자 볼 것 하나도 없어요'하고. '물의 정원'은 강가에 만들어 놓은 정원인데, 정원이라 하기에는 너무 볼 것이 없는 곳이다. 그냥 산책로라고 이름 붙이는 것이 맞겠다는 것이 지역주민인 나의 생각이다. 멀리서 힘들게 이곳에 오는데 기왕이면 다른 곳으로 가라고 추천해주고 싶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붙들고 추천해주지는 않았다. 속으로 그랬다는 것이다.
달팽이 동상의 추억
아이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우리 옆 테이블에 있던 사람들이 물의 정원 얘기를 하더라. 거기 좋다고 소문났나 봐. 거기 진짜 볼 것 없는데. 물의 정원 기억해?" 했더니, 아이도 그곳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아이는 나와 달랐다. 그곳에는 달팽이 모양의 조형물이 있었다. 느린 마을을 표방하며 세워둔 것이었다. 아이는 놀 것 하나 없는 물의 정원에서 커다란 달팽이를 기어 올라타면서 신나게 놀았었다. 올라갔나 내려갔다 하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았다. 아이는 그 기억을 떠올리며 "그때 참 재미있었는데" 했다. 아이가 달팽이 동상을 얘기하니 물의 정원에서의 추억이 하나 둘 떠올랐다.
시골에 이사오니 넓은 아스팔트 바닥을 만나는 것이 힘들어졌었다. 대부분 흙바닥이었고, 아스팔트 바닥은 좁았고 차들이 지나다녔다. 큰 아이가 막 취미를 붙인 인라인 스케이트를 안전하게 탈 곳이 없었다. 그런데 이곳 물의 정원에 꽤 넓은 아스팔트 바닥이 있었다. 인라인 스케이트 타기 안성맞춤이었다. 아이는 이곳에서 자전거도 배웠다. 몇 번 넘어진 후 쉽게 자전거를 배운 아이는 정원 안을 통과하는 자전거길에서 신나게 자전거를 탔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어른들의 자전거를 피하느라 고생하기도 했었다. 아이는 아빠와 함께 이 길을 따라 꽤 멀리까지 자전거를 탔다. 큰 아이가 자전거를 타는 동안 나는 둘째 아이와 쑥을 캐고 곤충을 관찰했었다. 작은 다리도 있었고, 강을 볼 수 있는 전망대도 있었다. 꼬불꼬불 산책로를 따라 뛰어놀 수 있어서 주말이면 놀이터처럼 가는 곳이었다. 옛 추억을 더듬다 보니 '볼 것 진짜 없는 곳'이 아니라 '보려고 하면 볼 것이 무수히 많은 곳'이었다.
물의 정원을 검색해 봤다. 좋은 후기들이 넘쳐났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길들이 보였다. 메타세쿼이아 길이 생겼고, 가을에는 대규모로 만들어진 코스모스 꽃밭을 볼 수 있나 보다. 넓은 잔디밭이 있어 피크닉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이가 올라탔던 달팽이 동상이 보이지 않아 아쉽기는 했지만 그때 그 시절보다 잘 가꿔진 것 같았다. 이제는 사람들이 몰려오는 곳이 되었는데, 나는 나의 기억 속에 있는 장면만 떠올려 그곳을 판단했다. 그것도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말이다. 옆 테이블의 커플을 붙잡고 '거기 가봤자 볼 것 하나도 없어요'라고 했더라면 완전히 잘못된 정보를 줄 뻔했다.
물의 정원의 달팽이상, 잔디밭을 뒹구는 아이들
직접 가봐야 알 수 있는 것들
며칠 후, 아이가 전통찻집에서 내려다보이는 곳에 있는 산책길을 걸어봤다고 했다. 차 마시면서 저기 산책해 보면 좋겠다고 얘기 나눴었던 곳이다. 저녁 먹은 후 걸어볼까 했는데, 어두워져서 가보지 못했던 곳이었다. 도서관에서 점심 먹고 산책 삼아 걸어봤단다. 아이는 직접 가보니 다르더라고 했다. 산책길도 잘 되어 있고, 새들을 관찰할 수 있는 망원경도 있고, 강으로 내려갈 수 있는 길도 있고. 아이가 말했다. "우리 동네 참 살기 좋은 곳이구나 생각했어."라고.
멀리서 보면 제대로 알 수 없다. 직접 가봐야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아무리 아름다운 산책로라도 멀리서 보기만 해서는 제대로 알 수 없다. 문제는 이 동네 산책로는 대체로 이래라는 나의 고정관념이 작용할 때이다. 이 고정관념 때문에 그 산책로에 가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가서 무엇을 느끼게 될지 모르면서 말이다. 내가 전통찻집에 직접 갔기에 아름다운 유리 다기들을 보고 꽃차의 향을 느끼고 맛보고, 심지어 다도를 배워볼까 하는 마음이 생겼던 것처럼 말이다.
나와 옆 테이블 커플들은 다른 사람이다. 같은 공간을 가더라도 느끼는 것이 다를 것이다. 게다가 나에게는 최신의 정보도 없었다. 나에게는 볼 것이 없어도, 그 사람들에게는 볼 것이 많은 장소일 수도 있다. 막 연인이 되려는 사람에게는 뜻밖의 추억이 만들어지는 장소일 수도 있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다. 직접 겪어 봐야 아는 것들이 있다. 사랑을 하다 상처받고 다시 일어서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경험, 갈등을 겪고 퇴사하고 또다시 취직하는 경험,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키우는 경험 등. 내가 경험해 보겠다고 선택하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되는 일들이 있다. 누군가는 해봐야 하는 경험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하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그 모든 조언들은 그 사람이 가진 기억, 정보, 판단에 의한 것일 뿐이다. 그 일을 직접 겪을지 말지는 내가 결정한다. 이것을 알면서도 나이가 드니 자꾸 사람들에게 이러쿵저러쿵 조언하게 된다. 나의 조언은 나의 작은 경험 속에 있는 것일 뿐인데, 나의 고정관점일 수 있는데, 젊은이들의 세상은 내가 살아왔던 세상과 다른데, 자꾸 잊는다.
나이가 들면 입을 닫고 지갑을 열라는 말이 있다. 지갑을 열라는 것은 '돈이나 주라'는 것이 아니라, 젊은이들의 행보를 응원해 주라는 말이라 생각한다. 무엇을 하든 너의 선택이라고, 선택하는 와중에 있다면 "밥 한 끼 사줄게, 힘내서 고민해"하는 것일 테다. 경험하기로 선택했으면, 경험하는 중에 힘들면 술 한잔 하라고 술값 보태주는 것일 테고.
옆 테이블의 남녀가 연인이 되었을지는 모르겠다. 다음번 여행에서는 물의 정원을 찾아 아름다운 산책길을 걸으면서 슬쩍슬쩍 어깨가 부딪히는 경험을 했으면 좋겠다. 그 경험으로 물의 정원이 평생 그들의 기억 속에 남겠지. 연인이 되지 않으면 어떤가, 찻집에서의 추억이 남을 테니 그것으로도 좋겠다. 나의 고정관념을 알아차리게 해 준 그대들의 앞날을 무조건 응원한다.
표지사진: Unsplash의 Erda Estremer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