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문R Nov 08. 2024

돌 길만 건너면 만날 수 있는 세상

강변 산책길, 커다란 나무 앞에서


우리 동네 산책길


우리 동네에는 강변 산책길이 있다. 흐르는 강을 바로 옆에 두고 걸으면서 강을 가르며 수상스키 타는 사람들도 볼 수 있고, 걷다 보면 유명한 카페들을 만나게도 되는 곳이어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호수를 끼고 걸을 수 있는 공원은 도시에도 많지만, 강을 옆에 두고 걷는 산책길은 흔하지 않다. 

그래도 동네주민들에게는 말 그대로 '동네 산책길'이다. 운동을 하기 위해서도 가고, 차 한잔 들고 천천히 걸으면서 대화를 하기 위해서도 간다. 자전거 길도 함께 있어서 아이들은 자전거 놀라고 해 두고 엄마는 걷기다. 걷다가 중간중간에 있는 운동기구를 이용해보기도 하고,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기도 한다. 나도 자주 가서 몇 번을 갔는지 헤아릴 수도 없는 길이다.


걷다 보면 동네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사람과는 인사하고 이야기 나누다가 헤어지지만, 가끔은 불편한 사람을 만나게도 된다. 모르는 척하고 지나가기도 하고, 인사만 하고 헤어지기도 한다. 강바람에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을 흘러보내 보지만, 찜찜한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날씨가 좋은 날이면 산책 나온 근처 초등학교 아이들을 만날 수도 있다. 선생님을 따라 줄지어 걷다가 뛰다가 주저앉아 노는 아이들을 보면 이유불문하고 흐뭇해진다. 과제가 있는지 여기저기 무리 지어 모여서 무언가를 찾는 아이들을 수도 있다. 쏟아지는 햇살과 살랑살랑 부는 강바람 아래에서 시간이 정지한 느껴지는 순간이다.


여름이면 더운 공기를 피해 밤에 걷는다. 강바람이 부니 시원해 걸을 한데, 문제는 날벌레들이다. 가로등 주변에 몰려 있는 날벌레들과 함께 걸어야 한다. 빠른 속도로 다가 달려드는 날벌레가 입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컥컥 거리며 벌레를 빼내기는 했지만 목구멍에 남아있는 그 불쾌한 느낌은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이후 나는 여름밤 산책은 포기했다. 벌레들과 함께 사는 시골의 삶이니 그러려니 하더라도 입속으로 돌진하는 벌레는 싫다.



낙엽 밟는 소리와 함께 산책을


일부러 산책하려 애쓰는 중이었다. 원래 의자 중독인데 글을 쓰다 보니 더 심해졌다. 집 근처 산책을 할까 하다 강변 산책길까지 나가 보기로 했다. 매번 가던 길, 익숙한 길을 걷기 위해 억지로 나섰다. 운동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무료했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걷기만 하는 것이 시간낭비 같이 느껴졌다. 이럴 때 나는 무언가를 듣는다. 듣기라도 해야 시간을 날려 먹은 것 같지 않다. 정한 시간을 채우면 무조건 산책을 끝난다. 나의 산책은 지금까지 그래왔다. 칸트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일정한 길을, 일정한 걸음걸이로 걸었다는데, 심심하지 않았을까, 무료함을 어떻게 견뎠을까 궁금해지곤 했다. 칸트 같은 철학자이니 가능한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이날도 딱 30분만 걷기로 마음먹었다. 걷다가 15분이 지나면 되돌아가기로 했다. 30분 동안 들을 유튜브 방송을 찾아 들으면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날은 뭔가 달랐다. 산책길을 들어서자마자 발밑에서 들린 '바사삭바사삭' 소리가 시작이었다. 그렇다. 가을이 오고 있었다. 오랜만에 듣는 낙엽 바스러지는 소리였다. 경쾌했다. 자신의 생명을 다해서 바싹 말라가는 나뭇잎 부서지는 소리가 경쾌하다니. 어린아이가 된 것 같았다. 듣던 방송을 끄고 귀에서 이어폰을 뺐다. 일부러 낙엽이 많은 길을 따라 걸었다. 더 많은 바스락 소리를 듣기 위해 이리저리 걷다가 커다란 나무 세 그루 앞을 지나게 되었다.   


낙엽 밟기 중


커다란 나무 세 그루 앞에서



매번 보던 나무 앞에서

산책길을 오갈 때마다 봐왔던 나무들이다. 지겹도록 봐왔던 나무들, 겨울에도 초록빛인 소나무들, 사진은 열심히 찍었던 나무들, 한 때는 나의 프로필 사진이기도 했던 나무들이다. 매번 지나치던 나무 앞이었는데 무언가가 나를 멈추게 했다. 바로 돌길이었다. 나무까지 갈 수 있는 돌길.


이 나무들은 강가 산책길보다 더 안쪽에 심어져 있다. 보통 산책길과 강 사이에는 갈대숲이나, 길게 헝클어져서 자란 풀들이 가득한데, 더 좋은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이 나무들을 심어 둔 것 같다.

나무들 아래에 작은 공터가 있지만, 나는 번도 가볼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그러니 당연히 돌길에 관심이 없었다. 헤아릴 없이 많이 길을 오갔지만, 이 돌길을 처음 보았다. 아니, 내 눈앞에 돌길이 나타났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다.

그 앞에 서서 주위를 살펴보았다. 들어가면 안 된다는 푯말도 없다. 마치 편하게 들어가 보라는 듯 주변 풀정리도 다 되어 있었다. 나는 왜 지금까지 들어가 볼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걸까.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오기 같은 것이 생겼다. 한 번도 해보지 않았던 일을 시도해 보겠다는. 


돌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게 뭐라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커다란 세 그루 소나무 아래에 섰다. 강이 더 가까이 있었다. 강 건너편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강바람이 그대로 얼굴을 스쳐갔다. 수상스키를 탄 사람들이 앞을 지나쳐갔갔다. 커다란 나무 밑이라 그만큼의 커다란 그늘이 있었다. 바닥에는 솔방울이 뒹굴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내가 걸어온 산책길과 내가 걸어갈 산책길이 훤하게 보였다. 걷는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길이다. 산책길에만 있었다면 보이지 않았을 장면들을 보면서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그곳에 서서 예전에 읽었던 책 <퓨쳐 셀프>의 한 대목, '경기장 안에 들어가라'는 말을 떠올렸다. 내가 서 있는 이곳, 소나무 세 그루 아래가 내가 뛰어든 경기장이었다. 나의 첫 종이책 예약판매가 진행 중이었고, 며칠 후면 실물 책으로 받아볼 수 있는 때였다.


경기장 안에 들어가라. 실패를 누적하며 결국 성공하라. 경기장 밖에 있으면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장소다. 관심 있는 주제에 대해 뒷짐 지고 비평이나 할 줄 알지, 진정한 프로는 되지 못한다. 경기장 밖에 머문다는 게 무슨 말일까? 지나치게 오래 생각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분석만 하다가 사고가 마비되는 지경에 이를 수 있다. 수많은 사람이 사업을 하겠다거나, 책을 쓰겠다거나, 새로운 언어를 배우겠다는 등 무언가 하고 싶다고 꿈만 꾸다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상대는 부전승으로 승리를 빼앗아간다. 경기장 밖에 앉아 있으면 실은 당신은 날마다 패배하는 것이다. 경기장 안에 들어가면 패배할 수도 있기에 들어가는 일 자체에 용기가 필요하다. 고통스러울 수 있지만, 그렇게 해야 배우고 성장한다. 경기장 안에 있다는 것은 ‘현실’을 직면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경기장 안에 있다 보면 마침내 미래의 내가 되어 현실을 원하는 대로 만들 수 있다
- 퓨처 셀프, 벤저민 하디, p101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라

나는 10년 여 년 전부터 글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계속 경기장 밖에 있었다. 나는 글을 못 쓰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평하며 두려움에 휩싸여, 시도와 불안, 도전, 실패 따위는 없는 안전한 경기장 밖에 있었다. 여기에 시간이 없다는 핑계, 나 같은 일반인이 글을 써서는 돈을 벌지 못한다는 현실인식이 보태졌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갔다. 


올해 초 나는 블로그 글쓰기를 시작하며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도 훌쩍. 초보자의 경기는 관중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내 마음대로 경기를 해도 되는 것이었다. 막상 경기를 하다 보니 초보자의 싸움의 대상은 나 자신이었다. 글이 잘 써질 때도 있고, 안 써질 때도 있다. 한 자도 쓰고 싶지 않은 날도 있고, 쓰고 싶은 글이 샘솟는 날도 있다. 하지만 나는 하루도 멈추지 않고 글을 썼다.

글을 쓰다 보니, 글쓰기라는 경기장 안으로 들어가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10년 전의 나는 글쓰기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경기장 위에서 열심히 뛰는 중이다. 블로그 글을 쓰고, 글쓰기 수업도 듣고, 브런치 글도 쓰고 공저 작가도 되었다. 일단 들어선 경기장에서 내려오지 않기 위해 매일 싸우는 중이다.


다시 돌길을 되밟아 산책길로 돌아올 때는 정해진 산책 시간은 중요하지 않았다. 해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되돌아가는 길, 모자를 당겨 쓰고 눈살을 찌푸리면서 그만큼 더 많은 낙엽을 밟으면서 천천히 걸었다. 아니다. 거닐었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거닐다'의 뜻이 '이리저리 한가로이 걷다'란다. 이날의 나는 정말로 거닐었다. 잠시의 산책 시간조차도 낭비하지 않기 위해 애쓰는 내가 하릴없이 거닐었다. 그렇게 거닐어도 충분히 괜찮았던 산책이었다. 아마도 내 옆에 존재했지만 있는지도 몰랐던 것을 발견해 내고, 시도해 본 데서 온 만족감 때문 아니었을까.     



나의 새로운 경기장들

일단 해보고 나면 느끼게 되는 감정들이 있다. '드디어 해냈다', '별 것 아니네', '이게 뭐라고 지금까지 망설였담', '해보지 않았으면 후회할 뻔했는데' 등의 긍정적 감정도 있지만, '해보니 별론데', '음, 이건 나랑 맞지 않는데', '괜히 했네'하는 부정적인 감정도 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이런 감정을 느끼려면 '그 무언가를 해봐야 한다'.

최근 나는 글쓰기 외에도 여러 도전을 하고 있다. 예전부터 막연히 배우고 싶었던 마더피스 타로를 배우기 시작했다. 타로 카드 한 장 한 장을 공부하면서 신화와 역사와 여성주의를 되새기고 있다. 타로를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지는 모르겠다. 다 배우고 나면 알게 될까. 그래도 일단 시작해 보았다. 내가 배워보고 싶었던 것이 바둑이나 낚시가 아니라 마더피스 타로였다면, 뭔가 이유가 있겠지.

다음 주에는 난생처음 모르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오프라인 독서모임에 참여한다. 극내향인 내가 자진해서 독서모임에 참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이어서 의무감으로 신청했다. 쓰는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읽어야 한다는 결심이 없었다면 신청하지 않았을 모임이다. 덜 창피하기 위해 <죄와 벌>을 열심히 읽고 있다.

이렇게 해보지 않았던 일의 경기장에 성큼성큼 들어가 본다. 경기장에 들어가면 패배할 수도 있지만 무엇인가를 배운다는 것은 확실하다. 내가 강변 산책길에서 '거닐다'를 배웠던 것처럼 말이다. 이런 배움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않은가.



매거진의 이전글 가봤자 볼 것 하나도 없는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