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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R Nov 14. 2024

도서관을 좋아해서 다행이야

수능, 그리고 김영하 작가 북토크


평상시처럼 하려 애쓰는 수능날


오늘은 큰 아이가 수능 시험을 보는 날. 시골이라 시험장이 집에서 멀다. 

"네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갈까? 아니면 엄마가 듣는 방송을 들을까?"

아이가 답한다.  "엄마 듣는 방송 들어. 평상시처럼."


시험을 앞두고 "무엇이든 평상시처럼 하자"라고 했었다. 어젯밤 엄마와 함께 자고 싶다는 아이를, 잠자는 환경 바뀌면 푹 못 잔다고, 수능 끝나면 엄마랑 자자고 했었다. 당연히 시험장으로 이동하는 모든 과정도 평상시처럼 이어야 한다. 매일 아침 아이를 도서관에 내려주면서 들었던 그 방송을 들으며 시험장으로 출발했다. 차 안에서 먹을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사과  몇 쪽과 구운 계란. 아이는 아침을 많이 먹지 않는다. 평상시처럼 간소하게 준비했다. 대신 쉬는 시간에 먹을 에너지 바, 사탕 등을 챙겼다.

문제는 커피였다. 아이는 곧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다. 이른 아침부터 찬 것을 먹으면 배탈이라도 날까 싶어 핫 아메리카노를 내려왔는데, 아이가 각성이 안된단다. 재빨리 근처 편의점에 차를 대고 얼음컵을 샀다. 뒷자리에서 머그잔에 얼음을 쏟아지는 소리가 들린다. 한 잔 마시니 아이에게도 나에게도 평안이 왔다. 그래, 맞아. '평상시처럼'이 중요하지.


시험장 근처에 오니 경찰 여럿이 교통 통제를 하고 있다. 빨리 차를 돌려서 나가란다. 안아 주지도 못하고 시험장으로 아이를 들여보낼 수밖에 없었다. 매일 아침 도서관에 아이를 내려주는 것처럼 그렇게 무심하게 들여보내게 되었다. 아이는 굳어진 얼굴로 인사를 하고 시험장인 학교로 들어간다. 도서관에 내려줄 때는 웃으면서 "오늘도 열심히 할게~" 하면서 들어갔는데... 역시 '평상시처럼' 하기는 아이도 나도 힘들다.


아이는 학교를 다녔으면 고2다. 홈스쿨링을 하며 혼자 공부한다. 이번 시험은 연습 삼아 보는 것이다. 내년이 진짜다. 하지만 아이나 부모나 긴장감은 같다.

긴 방황을 마무리하며 아이에게 드디어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대학을 가야 할 수 있는 일이니, 올해부터 욕심을 내어 본격적으로 입시 공부를 했다. 공부한 만큼 성적이 오른다. 책 읽기를 좋아했던 것이 크게 도움이 된다. 공부를 하면서 책도 읽고, 공연도 보러 다니고, 음악도 듣는다. 내가 길게 공부해야 하니, 쉬엄쉬엄해야 된다고 말해주었다. 어른들의 근무 시간이 8시간이다, 그만큼만 공부해도 된다, 주말에는 놀아라 했다. 그래도 혼자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이가 외롭다고 하면, 내가 동무가 되어 함께 있어 주었다. 엄마랑 얘기하는 것, 함께 공부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으니 다행이다 싶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쉽지 않았다. 책 한 권은 쓸 내용이다.



새로 생긴 도서관에서 김영하 작가님 북토크 내용을 떠올리며

 

아이를 들여보내놓고 마음이 왔다 갔다 해서 근처 도서관을 찾았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고 집에 있으면 걱정만 할 것 같았다. (아이에게는 연습 삼아 보는 시험이라고, 모의고사 보는 것처럼 보라고 말해놓고 내가 괜히 긴장된다.) 마침, 시험장 근처에 엄청 커다란 도서관이 새로 생겼다. 지나다니면서 보기만 했는데 이번 기회에 방문해 보았다.  

1층에 커다란 서가가 있었다. 최근에 이런 디자인의 도서관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다른 점은 지역 주민들이 기증한 책이 꽂혀 있다는 것. 카페와 편의점도 있고, 곳곳에 널찍한 휴게공간도 있다. 열람실도 깔끔하고, 전망도 좋다. 새로 생긴 도서관답다. 집 근처에 있으면 매일 오고 싶다.   




도서관에 앉아 있자니, 얼마 전에 참석했던 <김영하 작가 초청 북이 토크>에서 작가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요약하면 이렇다.


"요즘은 책 읽는 사람이 힘든 세상이다. 책을 읽는다고 하면 주변에서 뭐라고 한다. 책을 사면 "또 사?" 한다. 하지만, 책을 자꾸 산다는 눈총을 받는다면 전형적 독서가다. 사는 속도가 읽는 속도보다 빠른 사람이 독서가다. 게다가 책은 독특한 상품이다. 사놓고 사용하지 않아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다. 책은 사서 꽂아놓기만 해도 효용이 있다. 책이 우리에게 말을 건다. '이제 좀 읽어야 하지 않겠니?'(ㅋㅋ) 읽지 않은 책으로 가득한 책장이 효과가 더 크다. 책 앞에서 지적인 겸허함을 느낄 수 있다.(ㅋㅋ) 우리 집에 읽은 책만 가득하다면 거기서 책 읽기가 멈춘 것이다."


"미국에서 책 읽기와 성적의 상관관계를 조사했다. 책을 많이 있는 것과 성적에는 인과관계가 없었다. 다른 변수들도 조사했다. 모두 인과관계가 없었다. 단 하나 인과관계가 있었던 것은 "장서의 수"였다. 집에 책이 많으면 성적이 높았다. 중요한 것은 책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이다. 스스로 책을 골라서 읽다가 실패하는 경험이 있어야 한다. 실패를 통해 스스로 책을 고르는 기쁨, '채집 황홀'의 경험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도서관은 아주 좋은 장소다. 지금 책을 읽지 않더라도 어린 시절 책을 좋아했다면, 책이 많은 환경에서 자랐다면 다시 책을 좋아하게 될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억지로 책을 좋아하게 만들려고 애쓰지 마라, 안된다.(ㅋㅋ)"


김영하 작가 초청 북토크, 작가님은 입담꾼이었다.



무너지고 있는 나를 살려낸 도서관 그리고 책


나 역시 그랬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는 책이 많았다. 책을 읽기만 하지 않았다. 동생들과 전쟁놀이를 할 때 성벽을 쌓기에도 활용되었고, 책으로 도미도도 만들었다. 동생들과 함께 방부터 마루까지 이어지는 어마어마한 도미노를 만들어서 한방에 무너뜨렸었다. 만화책은 네모 라인을 따라 칼로 잘라서 팝업북처럼 만들기도 했고, 책에 낙서도 꽤 했다. 책을 망가뜨렸다고 혼나본 기억은 없다. 책과 함께 뒹구는 우리들이었다. 자연스럽게 한글을 뗐고, 속독이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책에서 멀어졌다. 입시 공부를 위해 책을 읽지 않게 된 후 내가 좋아서 책을 읽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학시절에도 읽어야만 하는 책을 읽었다.    


내 인생이 무너지고 있던 어느 날, 나를 이해하기 위해 상담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도서관을 찾았다. 책을 무료로 볼 수 있는 도서관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대출증을 만들고 책을 한 권씩 빌려 읽기 시작했다. 이것이 나의 모든 변화의 시작이었다. 심리학 책을 쌓아놓고 읽기 시작했다. 마침 오후에 출근하는 직장에 다니고 있던 터라, 오전에 도서관에 들를 수 있었다. 퇴근이 늦으니 피곤했지만 괜찮았다. 아무도 몰래 아침에 도서관에 들렀다 출근한다는 쾌감도 있었다. 이때 김영하 선생님이 말씀하신 <채집 황홀>을 경험했다.

제주도에서 고사리 따는 할머니들의 길을 잃게 만든다는 채집 황홀, 전복 따는 해녀들의 목숨까지 위협한다는 채집 황홀. 도서관에 있는 수많은 책들 중에서 내 마음을 당기는 책들을 고르고, 쌓아놓고 읽는다. 그러다가 마음에 드는 책이 있으면 대출한다. 집에서 사무실에서 꼼꼼히 읽다 보면 '이건 별론데' 하는 책도 있지만 '이건 소장각이야' 하는 책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 사는 거다! '사는 속도가 읽는 속도보다 빠른 사람이 독서가'라는 김영하 선생님의 말씀이 백번 천 번 옳다. 게다가 도서관에서는 고사리 따는 것처럼 길 잃을 위험도 없고, 바닷속이 아니니 숨을 참을 필요도 없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내 인생이 무너지고 있던 그때 내가 찾았던 곳이 도서관이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게임이나 술에 의존했다면 큰일 날 뻔하지 않았나.   

오늘같이 마음 심난한 날, 도서관에서 편안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도서관을 좋아해서 정말 다행이다.

수능 끝나면 책 좋아하는 아이와 이 도서관에 들러봐야겠다. 아이도 책을 좋아하니 얼마나 다행인가.



오늘 채집한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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