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우선순위가 바뀌고 나의 오전 시간도 바뀌었다

50대 여성 재취업 분투기] 3 _ 글쓰기로 채웠던 오전 시간이 달라졌다

by 블루문R


사십 대 어느 즈음인가 내 책을 쓰고 싶었다. <나이 사십, 내 책을 써라> 같은 제목의 책들을 읽어보았다. 밑줄 그으면서 읽었지만 정작 나는 글을 쓰지 못했다. 한창 자라는 아이들 돌보고 일을 하면서 책 쓰기에 대한 꿈은 잊혀갔다.


재작년 10월 퇴사한 후, 시간이 흐르고 마음도 안정되니 그동안 미뤄두었던 꿈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랐으니 이제 온전한 내 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 정말 글을 써볼까 싶어졌다.

10여 년 만에 들여다본 글쓰기 환경은 혁명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등단 작가가 아니어도 누구든지 글을 쓸 수 있는 세상이 되어 있었다. 내 글을 공개하여 사람들에게 바로 피드백받을 수 있는 글쓰기 플랫폼들이 생겼고, 자비출판부터 전자책 발행까지 다양한 방식의 출판도 가능해졌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고 있었다. '지금 글을 쓰고 있으면 작가'라는 응원이 넘쳐났고, 작가라는 '꿈'은 도전해 봄직한, 현실 가능한 꿈이 되었다. 저 높은 곳에 계시는 고매한 작가님들은 이런 세태에 혀를 찰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런 현상이 반가웠다.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었던 글쓰기 시장의 권력관계가 해체되어 가고 있었다. 작가가 되는 길에 다양한 모양새의 샛길이 생겼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는 세상이야말로 평등한 사회로 가는 과정의 필수적 요건 아닐까 생각하며, 나도 그 길에 들어서보기로 했다.


1514325.jpg © CoolPubilcDomains, 출처 OGQ



나에게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고민하지 않았다. 10년을 미뤄두었던 일이니 그냥 해보기로 했다. "할까 말까 고민해 봤자 시간만 간다"가 내 삶의 모토가 된 순간이었다.

매일매일 글을 썼다. 물론 글쓰기는 쉽지 않았다. 글감을 생각하며 머리 쥐어뜯다 보면 봐주는 사람도 없고 돈도 되지 않는 이놈의 글쓰기를 왜 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들어차기 마련이다. 부정적 생각이 들어설 가능성을 차단해야 했다. 글쓰기 초보니 공부하고 연습해야 한다 다짐했다. 연습하려면 루틴이 필요했다.


유혹에 빠질 만한 상황이 왔다 할 때 중요한 것은 절대적인 규칙이다. 내가 이걸 할까 말까 할까 말까 생각을 하는 순간 뇌가 에너지가 소모를 하면서 이미 약해진다. 그래서 이 상황에 들어왔을 때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고 이 행동을 한다고 자동프로그래밍을 해 놓으면 행동을 바꿀 수 있다.

- 유튜브, 장동선의 궁금한 뇌, <나는 왜 이렇게 게으른 걸까?>


우연히 본 뇌과학자 장동선 박사님의 유튜브 쇼츠에서 본 내용이다. 글쓰기라는 고단한 작업을 계속하려면 할까 말까 고민하지 않도록 자동프로그래밍해 놓아야 했다.

오전 9시면 커피를 내려 거실에 있는 커다란 테이블에 앉기로 했다. 맞은편에는 홈스쿨링하는 둘째 아이가 앉았다. 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오늘 분량의 공부를 하고 나는 글을 썼다. 글을 쓰기 싫은 날에도 글감이 떠오르지 않는 날에도 일단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러다 보면 어찌어찌 글이 써졌다. 신기했다.

매일 오전 글을 써놓은 후 다른 일을 하는 나날들이 계속되니 좋은 점이 많았다. 가장 중요한 일은 오전에 하라는 격언이 이해가 되었다. 두뇌가 팽팽 도는 오전, 나의 에너지를 최대한 활용해서 글 한 편 쓰고 나면 하루가 뿌듯했다. 퀄리티와 상관없이 나만의 것을 창조했다는 기쁨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었다. 나 자신과 한 약속을 지켜내고 하루를 시작하니 나 자신에 대한 만족감도 커졌다. 글쓰기가 내 삶의 1순위였던 날들이었다. 그렇게 오전 9시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자동프로그래밍이 만들어졌다.



prophsee-journals-WI30grRfBnE-unsplash.jpg



습관은 무섭다. 머릿속이 돈 걱정으로 가득 차 있는 나날들 가운데에도 나는 오전 9시면 무조건 노트북 앞에 앉았다. 그러나, 글은 쓸 수 없었다. 돈벌이 궁리로 가득 차 있는데, 가벼운 일상을 담는 에세이를 쓰는 것은 불가능했다. 멍하니 노트북 앞에 앉아 있다가 슬쩍슬쩍 구직 사이트를 뒤지기 시작했다. 오십 넘은 나를 누가 써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도전해 볼 만한 일자리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갑자기 지원해 보고 싶은 일자리가 나타났다. 내 경력과 관계있는 일이지만 분야가 달랐다. 전부터 해보고 싶은 일이기는 했다. 월급이 적었지만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위치였고 출근 시간도 선택할 수 있었다. 출퇴근 시간 조정이 된다면 홈스쿨링 하는 두 아이들도 챙기면서 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팀원을 구하고 있다는 것. 팀원 자리에 지원하기에 나는 경력이 너무 많았고 나이도 많았다. 그래도 지원해 보기로 했다. 할까 말까 망설이다기 시간만 가는 것을 알기에. 이전에 재직했던 직장에서 경력증명서를 받고,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썼다. 그 사이사이 취업사이트를 뒤졌다. 그리하여 애써 만들었던 '오전 9시 노트북 열기' 습관은 입사지원서 쓰는데 활용되기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일을 했던 오전 시간은 취업을 위해 노력을 하는 시간이 되었다. 지금 내 삶의 1순위는 취업이니까.


그래도 매일매일 꾸역꾸역 글을 썼던 시간이 헛된 건 아니었다. "할까 말까 망설이다 시간만 가니 일단 하고 보자" 하는 태도로 살면서 브런치 작가도 되고 공저도 2권이나 출간했던 경험은 이 나이에도 일단 입사지원서 넣어보자고 마음먹게 했다. 매일 글을 썼으니 자기소개서 쓰는 것도 그리 부담스럽지 않게 느껴졌다. 얼마나 다행인가.


드디어 나의 입사지원서를 이메일로 발송하는 날이 왔다. 제대로 된 입사지원서를 제출해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십 년, 십 오 년 전이었던 것 같다. 메일을 발송하고 나니 온갖 걱정이 몰려온다. 메일 주소에 오타가 있는 건 아닐까, 빼먹은 서류가 있는 건 아닐까, 자기소개서를 제대로 쓴 게 맞을까 등등. 그러나 이미 내 손을 떠났다. 이제는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매거진의 이전글아직은 배가 덜 고픈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