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대 여성 재취업 분투기] 7 _ 비뚤어지는 나를 발견하다
마트에서 장을 봤다. 예상했던 것보다 금액이 많이 나왔다. 이상한데? 영수증을 꼼꼼히 살펴봤다. 저렴해서 집어온 진미채가 19,500원이라고 찍혀 있다. 금액을 잘못 봤나 보다. 환불을 요청했는데, 계산 손님이 많으니 기다리란다. 기다리고 기다려서 악착같이 환불을 받았다. 진미채를 손에 들고 기다리다 보니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의 장바구니를 보게 된다. 갑자기, 훅, 19,500원짜리 진미채를 덥석덥석 살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진다. 너네는 좋겠다. 돈 팍팍 쓸 수 있어서.
나보다 나이 많은 분들이 대부분인 모임에 참여 중이다. 처음에는 몰랐는데 몇 번 모임을 하다 보니 알게 되었다. 이분들이 이 모임에 주기적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안정적인 노년, 윤택한 노년을 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교사, 공무원, 대기업 간부 등으로 생활하다가 은퇴한 분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니면 배우자가 사업 등을 이유로 돈이 많거나. 아이들 결혼시키고, 골프 치고, 여행 다니며 노년의 삶을 산다.
'그렇군요, 멋지네요'하고 맞장구쳐주며 들었던 유유자적한 이들의 삶의 이야기가, 어느 순간부터 '너희들은 좋겠다, 자기 자랑하냐'로 들리기 시작했다. 물론 그분들이 수십 년 동안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받는 혜택이라는 것은 알지만... 내 속이 꼬여 버린 게다. 슬슬 모임에 나가기 싫어진다.
독서모임에서 함께 읽는 책에 스티브 잡스, 빌 게이츠, 양현석, 싸이 등등이 좋아서 하다 보니 성공했다는 내용의 글이 있었다. 정해진 프레임에서 소소하게 따지고 계산하는 사람은 크게 성공하지 못하지만, 이런 자잘한 계산들을 무너뜨리고 감각적인 통찰을 믿고 나가야 대인배라고 요약되는 글이었는데, 나는 버럭 화가 나고 말았다. "이런 글은 편하게 사는 사람이니까 쓸 수 있는 글이지!, 글쓴이, 너도 교수잖아! 매일매일 소소하게 따지고 계산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무나 성공하는 줄 알아???!!!"
'자기가 자기로 존재하라'라고 말하는 인문학 책들. 나도 많이 읽었었다. 좋은 책들이었다. 나 자신으로 살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도 했었다. 이 책 역시 좋은 책일 테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책을 읽을 수가 없다. 자신으로 살도록 놔두지 않는 세상을 절감하고 있는 나에게, 이런 글은 저 위에 있는 사람이 내려다보면서 가르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기 자신으로 살지 못하는 나는, 이런 책 앞에서는 바보 같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책을 덮어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들춰보지 않았다.
탈락이 계속된다. 서류도 탈락, 면접도 탈락. 다시 채용정보를 검색하고, 서류 마감일을 확인하고, 자기소개서를 쓴다. 본격적으로 취업 준비한 지 몇 달도 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다, 포기하면 안 된다 생각하지만 마음은 지쳐가고, 잉여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자꾸 실패하는 나에게 세상 모든 것이 삐딱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좋은 글도, 좋은 사람들도, 다 삐딱하게 보인다. '이런 걱정 없이 사는 너네는 좋겠다'하게 된다. 그 사람들은 잘못한 게 없는데 내가 문제다. 이러다가 내가 망가지겠구나 싶다.
나를 망치지 않기 위해, 더 이상 삐딱해지지 않기 위한 방법은 나를 위한 일,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다. 억지로 해야만 하는 일은 하지 않는 거다
'불꽃야구' 직관 경기를 예매했다. 혼자 가기로 했다. 혼자서라도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공간에 가기로 했다.
넓은 고척돔에 나는 혼자였다. 친구와 가족과 야구를 보러 온 사람들 속에서 나는 혼자였다. 덕질은 혼자 하는 게 진짜다! 용기를 내본다. 클리퍼를 치고, 노래를 함께 부르고, 두 손 꼭 부여 잡고 응원했다. 이택근 선수, 정근우 선수, 박용택 선수 등 펄펄 날아다니는 나이든 선수들의 경기를 보고 있자니, 기운이 불끈 났다.
그래! 나에게는 야구 경기 직관할 돈 정도는 있고, 좋아하는 것을 혼자서도 즐길 용기가 있다!
나는 원래 혼자서 어디든 잘 가는 사람이었다. 새로운 것에 도전도 잘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내가 되살아나는 날이었다.
읽고 싶지 않은 책은 읽지 않기로 했다. 대신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 내가 좋아하는 문체들의 글을 더 적극적으로 찾아서 읽었다.
은유 작가의 <글쓰기의 최전선>, <다가오는 말들>, <해방의 밤>,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등을 다시 읽었다. 은유 작가가 사랑하는, 나도 좋아하는 작가 리베카 솔닛의 <세상에 없는 나의 기억들>, <걷기의 인문학>,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도 함께 읽었다. 밑줄 빡빡 그으면서. 좋은 문장들은 옮겨 적으면서.
글쓰기를 통해 세상을 향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은유 작가. 은유 작가의 책에는 나처럼 고군분투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에 대한 든든한 연대와 믿음이 있다. 뭘 하라고 채찍질하지도 않고, 어떤 삶을 살라고 가르치지도 않는다. 나도 이런 글을 쓰고 싶다.
아이들과 군산 여행도 다녀왔다. 날씨가 더워서 힘들었지만 맛있는 거 먹고 좋은 것 구경했다.
이제 청소년이 된 아이들과 모두 흩어져서 자기가 가는 "따로 또 같이" 여행도 했다. "따로 또 같이" 여행은 우리 가족의 여행 방식이다. 혼자서 자기가 가고 싶은 곳에 가는 것. 큰 아이는 버스를 타고 군산여기저기를 누비고, 둘째는 너무 덥다며 숙소에 있었고(돌아다니기 싫으면 숙소에서 쉬어도 된다), 나는 동네를 헤매 다녔다. 아기자기한 볼 것들이 가득한 군산은 헤매는 것을 좋아하는 나의 본성을 불러일으켜 주었다.
물론 필사도 한다. 최근 필사하는 책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 돈 없는 미래가 두려워 안달복달하는 내 마음을 붙잡아주는 명상의 기능을 할까 싶어 골라봤다. 좋은 영화도 보고, 뜨개질도 하며 그렇게 내 일상을 지켜가고 있다.
세상이 나를 삐딱하게 만들 때, 상황이 나를 삐딱하게 만들 때는 내가 나를 돌봐야 한다. 내가 나를 돌보는 하나의 방법에는 글쓰기도 있다. 글쓰기야말로, '취업'이라는 큰 과제를 앞두고 오락가락하는 나를, 더 이상 삐뚤어지지 않게 나를 잡아주는 멋진 수단이라고 나는 믿는다.
우리 삶이 불안정해지고 세상이 더 큰 불행으로 나아갈 때
글쓰기는 자꾸만 달아나는 나의 삶에 말을 걸고,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고, 살아있는 것을 살게 하고,
인간의 존엄을 사유하는 수단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 은유, 글쓰기의 최전선, p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