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갑자기, 멈춰 서야 했다 2

50대 여성 재취업 분투기] 10 _ 경력단절의 의미를 생각하다 2

by 블루문R


어느 날 아침,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평일 오전이면 친정에 들러 엄마를 돌봐주시던 요양보호사 님의 전화였다. 요양보호사 님이 출근했다가 화장실에서 쓰러진 채 돌아가신 친정 아빠를 발견하셨단다. 119에 연락은 했다면서, 그래도 무섭다며 빨리 와달라며 울먹이시는 요양보호사님에게 감사하다고 인사해 두고 동생들에게 연락을 했다. 정신이 없어서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아이들을 챙기며 머릿속으로 챙겨야 할 것들 리스트를 정리했다. 장례식장, 음식들, 주변 사람들 연락 등등.

이날이 자격증 취득을 위한 첫 관문인 영어시험 바로 전날이었다는 것은 아빠를 장례식장으로 모시고도 한참 지나서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물론 그때는 알 수 없었다. 이것이 나의 '멈춤'의 시작일 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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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70대 초반,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았다. 약으로 진행 속도는 늦출 수는 있지만 결국 수년 후에는 치매로 진행된다고 했다. 처음에는 마트나 성당을 다닐 정도는 되셨지만(얼마 지나지 않아 성가대는 못하게 되셨다) 정서적인 변화가 심했다. 억지와 고집, 약한 망상까지 뒤섞인 엄마를 보살피는 것은 아빠의 몫이 되었다. 엄마는 약을 먹어 놓고도 아빠가 약을 숨겨놓고 주지 않는다며 온 집을 뒤졌고, 아빠는 약 봉투를 숨기느라 힘들어했다. 평생 엄마를 힘들게 했던 아빠가 -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 엄마에게 괴롭힘을 당하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상황을 투덜투덜 얘기하다 '장기요양등급', '요양보호사' 같은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제도였다. 하루 몇 시간만이라도 요양보호사가 엄마를 돌봐준다면 아빠의 숨통이 트일 수 있겠다 여겨졌다. 다행이었다. 그렇게 친정집을 오가게 된 요양보호사 님이 계셔서 아빠의 시신을 발견했으니, 이 또한 다행이었다.

엄마는 아빠가 화장실에서 자는 줄 알았단다. 흔들어 깨웠는데 일어나지 않으니 이불을 덮어줬단다. 장례식 중에도 엄마는 내내 상주용 방에서 잠만 잤다. 잠깐 깨면 "내가 왜 여기 있냐, 집에 가겠다"면서 뛰쳐나가려 했다. 아빠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는 상태가 아니었을까 짐작만 해본다.



장례를 마칠 즈음이 되니 '혼자 남은 엄마를 누가 모시냐'를 결정해야 했다. 요양원에 모시기에는 엄마는 너무 젊었다. 동생들은 모두 풀타임으로 일하고 있었기에 프리랜서인 내가 엄마를 모시기로 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고, 평생 힘들었던 엄마가 아빠 없는 세상에서 손주들과 함께 살면서 조금이라도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나의 소망이 겹쳐졌다.

결정을 내리고 나니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엄마와 함께 살 수 있도록 넓은 집으로 이사했고, 그 바람에 큰 아이는 전학을 했다. 부모님이 살던 집을 처분하고 엄마의 짐을 옮겨왔다. 화장실이 딸려 있는 가장 큰 방을 엄마 방으로 정해, 친정집의 모양새와 비슷하게 배치했다.

그 기간 동안 엄마는 우리 집 근처 요양원에 머물렀다. 엄마는 하루가 멀다 하고 집에 오고 싶다고 연락을 했다. 두 집 이사하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요양원에 들러 엄마를 다독이는 일까지 모두 내 몫이었다.



그러나... 엄마가 우리와 함께 살게 된 지 이틀 만에 알았다. 나는 엄마와 함께 살 수 없는 딸이었다는 것을. 엄마를 매우매우매우 싫어했다는 사실을 왜 잊고 있었을까. 모실 수 있을 때까지는 모셔보자 마음먹었던 나의 결심은 망상이었다. 가부장제 사회 속에 고통받았던 엄마를 내가 구제해 줄 수 있을 거라는 환상, 부모님 병간호하면서 화해했다는 누군가처럼 될 수 있을 거라는 거대한 망상의 덩어리 속에 내가 있었던 거다.

엄마는 자신의 시계가 없어졌다면서 새벽부터 온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었고 급기야는 자고 있는 아이들 침대 머리맡까지 뒤졌다. 엄마는 엄마가 아끼던 거의 모든 가구를 챙겨 와 원래 살던 집처럼 꾸민 방도, 가장 큰 방을 자기가 사용하게 되어 작은 방을 쓰게 된 딸과 사위의 마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심지어 손주들도 관심 밖이었다. 오로지 자신의 통장이 어디 있는지가 중요했다.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잊은 내가 바보였다.

엄마를 모시는 내내, 나는 아빠 친구분이 해주었던 충고 말씀을 떠올렸었다. "네 마음은 알겠는데, 네가 엄마를 모시면 안 된다. 너도 엄마도 다 힘들어진다. 그냥 요양원에 모셔라" 하셨던 말씀. 그때 모르는 척하고 그 말을 들었어야 했다.


처음에는 하루 종일 집에 계실 수 있는 요양보호사 님을 고용해서 일도 하고 아이들도 돌봤다. 하지만 요양보호사님은 몇 달을 버티지 못했다. 결국 근처 '요양보호센터'를 찾았다. 노인들의 유치원이라더니, 그에 걸맞게 등하원 차량이 운행되었다. 아이들 등하교 시간에 맞춰 짜였던 나의 일상은, 이제 엄마의 '요양보호센터' 이동 시간에 맞춰지게 되었다. 엄마가 귀가하는 시간에는 집에 있어야 했으니, 받을 수 있는 강의도 점점 줄어들었다. 우리 가족만의 여행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시댁에 가려해도 엄마를 봐줄 사람을 찾아놓고 움직여야 했다. 나는 지쳐갔고, 아이들 재워놓고 새벽까지 하던 공부도 손을 놓게 되었다. 당연히 자격증 공부는 딴 나라 이야기가 되었다.


병세가 악화되어 엄마를 요양원에 모시기까지 3~4년의 시간 동안 엄마와 함께 살았다. 엄마에 대한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 찬 채 보낸 그 시간들 동안 나는 에너지를 잃어갔다. 엄마를 요양원에 모시고 나니 탈진 상태가 되어 버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멈춤'의 시간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나를 붙들고, '네 경력이 아깝다, 뭔가를 배워봐라, 더 늦기 전에 다시 자격증 공부라도 해봐라'라고 했으면 버럭질을 했을지도 모른다. 아니 화낼 에너지도 없었을 거라는 게 더 정확하겠다. 지금 돌이켜보니 그 시간 동안 나는 '경력단절 여성'이었다. 내가 원한 것도 아닌데,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돌봄 노동이었는데 내 삶이 '단절'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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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경력단절 여성'이라는 단어 대신, '경력보유여성'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돌봄 노동에도 경제적 의미를 부여해 경력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만들어진 단어란다. 실제로 2021년 서울 성동구에서 전국 최초로 관련 조례를 제정하면서 전국의 지자체로 확산되고, 국회에서도 관련 법이 발의되고 있는 중이라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이 단어에 따르면 내가 엄마를 모셨던 '멈춤'의 시간도 '경력보유' 기간이 된다. 나의 멈춤의 시간에 대해 사회적인 의미가 부여되니 그 시간들이 낭비가 아니었다고 여겨지게 된다. 법적, 사회적 용어가 나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바꾸게 하다니... '새로 만들어진 단어가 소외된 삶을 건강하게 규정짓는' 경험을 하게 되는 순간이다.


돌봄 노동에 자신의 삶을 갈아 넣느라 고생한 당신이여, 이력서에 쓸 것이 없다고 자책하지 마시길. 그 시간 동안 우리가 갈고닦은 무공은 엄청나다. 무엇보다도 인내심, 계획성, 여러 가지 일 한꺼번에 해치우기 신공 등은 가히 따라올 자가 없다. 당신은 '경력보유 여성'이라는 걸 잊지 말자.

세상 사람들에게도 한 마디 덧붙인다. 돌봄 노동에 지쳐있는 사람들에게, '왜 자신의 시간을 가지지 않냐, 자기 자신을 위해 노력해 봐라, 왜 일을 하지 않냐' 다그치지 마시길. 사람에게는 다 그마다의 사연이 있다. 지치고 지쳐있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억지웃음을 짓고 있던 순간, 누구나에게 다 있지 않나. 도움을 준다고, 힘내게 한다고 하는 말이 당신 앞에 있는 사람을 더 힘들게 할 수도 있다는 걸 잊지 말자.

그리하여, 돌봄 노동의 시간을 통과하여 세상으로 나와 마음껏 경제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다양한 기회와 가능성이 열리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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