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난중일기 (10)

과욕이 부른 대참사

by epoche

웬만한 영화보다 휠씬 더 극적인 줄거리였다. 이미 충분히 먹고 살만한 내 또래 남자가 고위험 원유 레버리지 상품으로 신분 상승을 도모하다 종국엔 파국으로 내리닫는 전개. 간접체험만으로도 머리털이 쭈뼛하면서 모골이 송연해졌다


코로나로 웬만한 제조업은 올스톱 된 형국이라 동력이 돼줄 원유는 처치 곤란해진 상황. 심지어 바다에 둥둥 떠 있는 원유 재고량도 어마어마한 지경에 이르렀다. 수급의 언밸런스가 나날이 심화되다 보니 원유 가격은 결국 대폭락했다. 특히 서부텍사스유, 이른바 WTI 선물 가격은 20$까지 주저앉아서 좀처럼 반등하지 못 하고 있었다. 시장의 이목이 집중되다 보니 전문가들이 준동하기 시작했다. '곧 중동 지역에서 전쟁이 발발할 거다', '강대국들이 암암리에 원유 수급에 개입해서 가격을 조정할 거다' 등 이런저런 그럴싸한 가설들이 제기됐다.


이렇듯 시중에 곧 원유 가격이 다시 반등하리라는 기조가 형성되면서 국내에서도 원유 레버리지 상품에 베팅하는 투자자들의 소식이 전해졌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배짱 두둑한 이들은 레버리지를 훨씬 더 크게 쓸 수 있는 WT 선물에 손을 대기도 했다. 서후 과장의 친구도 그중에 한 명이었다. 문제는 그 규모, 그리고 그 자금의 출처였다. 6 억. 그것도 부모님이 물려주신 아파트를 은행에 담보로 제공하고 무려 6억을 대출받아 그는 한 바구니에 욱여넣었다. 레버리지를 총동원한 과감한 승부수였지만, 반대로 크게 부러질 수도 있는 도박이었다. 물론 모든 도박의 이면에는 나름의 논리가 있기 마련. WTI는 $20 아래로 내려가면 보란 듯 반등했고 생산원가를 고려했을 때 이 아래로 내려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중론이었다. 친구분은 어느새 60%에 매도해서 꼬마빌딩 한 채를 구입한 뒤, 월세나 따박따박 받으면서 편하게 사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의 그날 밤. 세계사에 두고두고 기억될 기현상이 벌어졌다. 대개 금융 투자에서 겪을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이마저도 좀처럼 생각하기 힘든 극단적인 경우라고 상정해보라면 대개 원금을 깡그리 날리는 것만 생각한다. 이마저도 좀처럼 생각하기 힘든 극단적인 경우라 간주하여 웬만해선 경우의 수에서 배제할텐데 이날 WTI 선물 시장에서 전대미문의 사건이 발생했다. WTI 5월 선물 가격이 $30 이 된 거였는데, 문제는 앞에 음의 부호가 붙은 것이었다. 가격이 음이라는 건, 물건을 주고 돈까지 얹어주는 거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발생한 건, 원유가 팔리지는 않은 채로 보관비용만 지속 발생시키기 때문. 애물단지로 전락한 원유를 들고 앉아서 생돈을 계속 까먹느니 차라리 보관비용보다 적은 돈을 주고서라도 미래의 소유권을 이전하는 현상이 벌어진 것이었다. 결국 꼬마빌딩을 갖고자 띄운 승부수는 보기 좋게 부러졌고, 결국 은행으로부터 대출받은 6억을 모조리 날렸을 뿐만 아니라 추가로 6억을 변제해야 하는 기가 막히는 상황이 벌어졌다. 얘긴즉슨 12억이라는 거액이 날아간 것이었다.


“아니, 이게 뭐 영화도 아니고...”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한편 나보다 더한 사람도 주변에 있구나 싶었다. 가증스러운 내 속내를 알아챈 듯 서후 과장이 얼음이 녹으면서 희석돼 묽어진 커피를 가볍게 한 모금 마신 뒤 말했다.

“김 대리님도 영화 한 편 찍고 계신 거 아닌가요?"

나는 뚜껑을 열고 단숨에 얼음까지 들이킨 뒤 당겨오는 관자놀이를 누르면서 말했다

"글쎄요, 영화 비스무리하긴 한데 이게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르겠네요... 부디 저희가 좋아하는 느와르는 아니어야 될텐데 말이죠,'

아메리카노만큼이나 씁쓸한 미소가 동시에 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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