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선.징.악 매.매.법.
“너희 둘이 집이 같은 방향이니 택시 같이 타고 가.”
서울 내에서도 불야성으로 손꼽히는 화려한 이태원 밤거리는 안 그래도 약한 술로 인해 흐려진 이성을 더더욱 몰랑몰랑하게 만들었다. 좀처럼 술을 안 먹는 내가 비틀거리게 만든 장본인은 초등학교 동창 권영균이었다.
영균이는 초등학교도 아닌 무려 국민학교 시절에 친했었던 아득한 추억 속의 인물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영균이네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 지방으로 이사를 가게 된 것. 당시엔 스마트폰이나 SNS는 고사하고 핸드폰도 나오기 전이라 자연스레 기별이 끊기게 됐다. 하지만 2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고 서로의 이름마저 가물가물해졌을 무렵, 우연찮게 예비군 훈련장에서 다시 조우하게 됐다. 그는 미국에서 꽤 유명한 로스쿨을 졸업하고 미국 변호사 자격증을 취득한 뒤, 한국에 들어와 내로라하는 증권회사의 사내 변호사로 활약하고 있었다. 아무튼 그날 이후로 간간이 기별을 주고 받으면서 다시 교분을 유지하게 됐다. 그러다 며칠 전 대뜸 자기가 요즘 잘해보고픈 여자가 있는데, 내일 이태원에서 만나기로 했으니 차제에 나도 동석하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친구를 불러 2대2 미팅 엇비슷한 자리를 성사시켜 볼 터이니 근사하게 차려입고 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굳이 평일에 이태원에서 술자리라니 썩 내키진 않았지만, 내심 여자분들의 용모가 빼어나다는 말에 못 이기는 척 나오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진짜였다.
‘괜히 아나운서 준비하는 건 아니구나...’
영균이랑 먼저 만나서 술잔을 한참 기울이고 나서야 느지막하게 온 파트너들. 비록 한 시간 가량 늦는 결례를 범했음에도 그다지 미안해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두 분 모두 미모가 출중했다. 그렇게 인사를 나눈 뒤, 술잔을 몇 번 부딪고 나니 취기가 오르면서 분위기가 한껏 화기애애해졌다. 한참 이런저런 신변잡기성 발언이 오가던 차 술기운으로 인해 볼이 핑크빛으로 물든 내 파트너가 요염한 눈을 흘기면서 말했다.
“오빠들도 혹시 주식해요?”
간만의 음주로 인해 다소 흐트러져 있던 차, 불현듯 주.식.이라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면서 움찔했다. 이제 어느 정도 손실도 많이 메꿨건만... 아직도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건지 몸이 먼저 반응한 것. 대충 내 사정을 알고 있는 친구가 술잔을 들고 내 눈치를 살짝 확인한 뒤 말했다.
“하다마다. 얘 완전 주식쟁이야. 이름부터 주신 아니야. 주식의 신!”
순간 그녀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정말? 그럼 오빠 돈 많이 벌었겠네?”
좀 당황스러웠지만, 굳이 또 아니, 라고 부인하진 않았다. 그야말로 취기응변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뭐, 그냥 월급만 따박따박 받아서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옆에 있던 파트너의 눈이 반짝댔다.
“근데 오빠는 차 뭐 타?”
딱히 차가 없는 게 부끄러운 건 아니었지만 분위기상 선뜻 답하기 어려워 머뭇대던 찰나, 영균이가 센스 있게 말을 가로챘다.
“전번에 기존에 타전 차 부모님 드리고 새차로 바꾼다고 하지 않았냐? 벤츠인지, 베엠베인지 독일차 염두에 두고 있다고 그랬었잖아?”
굳이 거짓말까지 하고 싶진 않았기에 답변하지 않은 채로 괜히 지나가는 종업원에게 밑반찬을 더 주문하면서 주위를 다른 데로 환기했다. 다행히 그새 주제는 다른 쪽으로 전환돼 있었다.
“난 구찌보다는 디올이 더 좋던데...”
자동차가 붕- 하고 떠나면서 가방을 하나 던지고 간 셈이었다. 그것도 아주 사치스러운 녀석들로다가 말이다. 심지어 이야기는 오도된 방향으로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디올 살 바에야 샤넬 사는 게 낫지.”
우리측 변호사님이 그 발걸음에 박차를 가했다.
“그럼 나 샤넬 사주는 거야?”
썸녀의 앙탈에 친구는 껄껄 웃으면서
“너 하는 거 봐서.”
라고 멋지게 응수했다. 애초에 불리한 형국이었건만, 순발력 있는 대처로 득보다 실이 많은 채 마무리됐다. 노련하고 여유 있는 남자측의 완급 조절이 아주 돋보였달까. 물론 요모조모 테스트를 해본 후 결과가 만족스러웠는지 허영심과 기대에 찬 눈빛을 노골적으로 보이는 여자측도 호각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그 한 수에 승리의 향방이 정해진 거 같은 느낌이었다.
“자, 이제 슬슬 가야지?”
승기를 잡은 영균이는 정해진 수순을 밟기 시작했다. 하긴, 이제 더 마시는 건 똥술이지... 나는 힐끗 옆에 파트너의 상태를 살폈다. 취한 거 같기도 하고, 취한 척하는 거 같기도 하고. 이런 술자리 경험이 일천한 나로선 쉽사리 가늠할 수가 없었다.
계산을 마치고 나온 이태원 밤거리. 다시 모두(冒頭)에 얘기했던 그 풍경이었다.
“너희 둘이 집이 같은 방향이니 택시 같이 타고 가.”
영균이의 눈은 취기로 더욱 게슴츠레해졌지만 그렇다고 인사불성 상태로 보이진 않았다. 녀석의 품 안에 안겨있는 썸녀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눈은 감겨 있었지만, 그조차도 통제의 범주에서 이뤄진 게 분명했다. 가녀린 두 다리도 향수와 알코올 냄새가 뒤섞인 그녀의 상반신을 곧잘 지탱하고 있었다.
“어, 도착했네! 또 보자고 브로!”
미국 유학파답게 주먹인사(fistbump)를 건네곤 두 남녀는 신속하고 정확하게 택시에 올랐다. 불과 방금 전까지 만취한 듯 비틀대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이제 우리 차례였다. 역시 내 파트너도 무척 취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차마 그녀를 안고 있을 만한 자신감은 없었기에 균형을 잃지 않도록 지지대 역할만 해주었다. 다행히 우리가 부른 택시도 잇따라 도착했다.
“기사님, 안녕하세요, 죄송한데 사당 먼저 들렀다 삼성으로 갈게요.”
거울로 흘깃 우리 상태를 살펴보는 기사분의 눈길이 느껴졌다. 순간 거절당하면 어쩌지 걱정했으나 별다른 얘기 없이 이내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야, 이 시간에 사람 엄청 많네.”
아직 주말도 아니건만 자정이 다 된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이태원의 밤은 화려한 불빛으로 물들어 대낮을 방불케 했다. 그렇게 인파를 뒤로 하고 계기판의 속도가 올라갈 즈음 갑자기 어깨 부근에 무게감이 느껴졌다. 별안간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온 그녀. 분내가 코를, 머리칼이 귀를 간질였다. 그래도 혹여 내가 움직이면 불편할까 싶어 몸이 잔뜩 경직된 채로 머릿속으로는 발칙한 망상 및 얄궂은 셈법이 시작되려는 차. 불현듯 사자성어가 머릿속에 떠오르면서 산통을 깼다.
‘권.선.징.악’
일종의 징크스랄까, 자기 최면이랄까. 곱버스에 시달릴 때부터 줄곧 권선징악 매매법이라는 테마에 나는 스스로를 옭아매고 있었다. 사실 딱히 대단한 분석이라든가, 기술도 없는 나로선 뭔가 수익에 상응하는 대가로 그나마 지불하기로 한 게 선량한 삶이었다. 하다못해 길거리에 쓰레기가 떨어져 있으면 줍는 작은 선행을 비롯해 일거수일투족을 청교도의 자세로 절제하면서 신에게 간원했다.
‘제발 주식 좀 오르게 해주세요! 다른 건 제가 다 포기하겠습니다.’
누가 봐도 괘씸하기 이를 데 없는 기복 신앙이었지만, 신께서는 간절한 마음이 갸륵했던 걸까. 적어도 현재까지 내 기도는 응답받고 있었다. 근데 오늘 만약 내가 다른 이를 섬기게 된다면? 나는 아직 신, 그리고 사실상 우상이 돼버린 주식의 노여움을 살 자신이 없었다.
“탁!”
그렇게 문이 닫히고, 언제 그랬냐는 듯 잘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스스로 대견해 하며 기사분에게 말씀드렸다.
“삼성역 코엑스 맞은 편으로 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