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 가는 길 (1)

by epoche

문득, 십여 년 전 신춘문예에 응모하겠노라며 끼적였던 단편이 떠올랐다. 먼지 쌓인 파일을 열어보니, 생각보다 낯간지럽진 않았지만 그만큼 아쉬운 대목들도 선명했다. 몇 군데 숨결을 다시 불어넣어, 기나긴 침묵을 깨는 방편으로 용기를 내어 올려본다. (3부작)




오늘도 어김없이 만석이다. 매번 "혹시나" 하는 기대는 금세 무너지고, 이내 사람들은 다시금 위태롭게 포개진다. 미처 균형을 잡을 새도 없이, 나는 임산부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는 희고 가느다란 손을 둥근 배 위에 올리고 눈을 감고 있었다. 마치 구원을 기다리는 성녀처럼, 평온한 얼굴로. 그 곁으로는 여전히 치열한 자리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 열차 출발합니다.


나지막한 안내방송이 어색한 평화를 알렸다. 비록 앉는 호사는 누리지 못했지만, 이 정도면 선방이다. 바로 옆 사내의 이마엔 땀방울이 줄줄 흘렀다. 용병처럼, 전투를 마친 자의 상흔이었다. 닦아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나도 곧 상해용사 대열에 오를 판이었다. 풍만한 성녀의 배에서 솟아오른 두 줄기 복수의 레이저 때문이었다. 이제는 두 시선이 하나로 합쳐져 죄인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그 순간, 웅크린 채로 인사를 건네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 잘 갔다 와, 오빠.


그래. 남편 노릇 하나 제대로 못하는 놈에게 그런 인사라도 해주는 게 어디냐. 그런데 그놈의 '오빠'라는 단어가, 기묘하게 전신을 타고 스며든다. 오-빠. 그 두 음절은 연애 시절 수천 번을 들었건만, 이상하게 결혼 이후엔 늘 어색했다. 음절이 따로 놀고, 심지어 생리적으로 아랫도리를 자극한다. 대부분은 말싸움 끝에, 아내가 충격요법 삼아 '오빠'를 꺼낼 때였다. 결국 드러나는 건, 무력한 남성성뿐이었다. 적어도, 한 달 전 그 일이 있기 전까진 틀림없이 그랬었다.


- 오빠, 어떡하지...


나는 신고 나갈 양말을 찾고 있던 중이었다. 자주 신던 게 보이지 않아 아내를 부르려던 찰나, 그녀의 목소리가 마침 먼저 들려왔던 것이었다.

- 오빠, 우리... 애 생겼어.


잠깐의 침묵. 임신이라니 말 그대로, 옷장 속에서 총알이 튀어나온 격이었다. 정적을 깨고 나온 나의 오발탄에 가까웠다.

- 뭐야, 피임의 '피'자가 '당할 피'였던 거야?


아내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유머라 하기엔 차갑고, 또 비아냥이라 하기엔 뜨뜻미지근했다. 사실은, 현실을 받아들이기 두려운 나의 무의식이 튀어나온 것이다. 기껏해야 자기연민에 가까운 말. 물론 아내에게 통할 말은 아니었다. 그녀도 알아차린 눈치였다.

-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더불어 오래된 틈 사이로 한 줌의 기억이 밀려들어왔다. 한참을 가슴 한 구석에 묻어두었던 장면들.


어스름한 저녁 무렵, 엄마의 안색은 밤보다 어두웠다. 불안했지만, 나는 용돈을 달라 칭얼거렸다. 평소처럼 취조는 없었고, 싱겁게 돈을 받았다. 한 시간쯤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들 무렵—갑작스레 집안을 울린 외마디 비명.


- 뭐?


나는 문 앞에 웅크렸다. 비좁은 틈 사이로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꾀죄죄한 공장 근무복에 빨간 띠가 인상적이었다.

-지금 나라가 망했는데, 하필. 애가 들어선 거야?


애가 들어서다니 깜짝 놀라 숨을 죽였다. 엄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 재섭이도 외롭잖아요.


내 이름이 낯설게 들렸다. 아버지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 지금 재섭이 하나 건사하기도 힘들어 죽겠구만, 당신도 나가서 금모으기 하고 IMF인지 뭔지 가서 구걸이라도 할 셈이야?


-여보, 그래도 우리 애잖아요.


- 여보. 정신 차려. 지금 우리 셋도 자칫하면 굶어 죽게 생겼다고.


더 이상 엄마의 반격은 없었다. 판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엄마는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이따금씩 흐느낄 따름이었다. 아버지는 귀가 먹은 건지 자신의 끼니만 때우고 다시 밖으로 '투쟁'인지 뭔지를 하러 나갔다. 그렇게 그의 청력이 돌아온 건, 앰뷸런스 사이렌이 집안을 울린 그날이었다.


내가 뛰어나갔을 때, 엄마는 이미 간 뒤였다. 방 안엔 해괴한 흰색 약봉지들만 차갑게 식어 있었다.

하얀 병원으로 가는 흰색 앰뷸런스 안에서, 까맣게 그을린 아버지는 말없이 연신 담배만 피웠다. 회색 연기에 젖은 갈색 눈동자. 그날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포악한 폭군이 아니라 허약한 꼭두각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병실의 엄마는 앙상했다. 정물화처럼 멈춘 풍경. 다른 건 또렷한데 엄마의 그림체만 흐릿했다.

나는 말없이 엄마 곁에 누웠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제야 피곤이 몰려오더니 스르르 눈이 감겼다.

- 저기 아저씨, 전화 왔어요.


화들짝 잠에서 깨면서 휴대폰을 떨어뜨렸다. 옆자리 소녀가 건넨 휴대폰 화면엔 '부장님' 세 글자가 떠 있었다.

- 예, 부장님. 김재섭입니다.


어제 기안한 보고서 건이었다. 시답잖은 소리에 이래저래 감정이 치받쳤지만 나는 저자세로 일관했다. 그게 정답이었다. 모욕적인 언사를 몇 분간 감내한 뒤, 통화를 끊었다. 진동으로 바꾼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아내였다.


'몸이 안 좋아서 며칠 친정에 가 있으려 해. 냉장고에 반찬 해놨으니 데워 먹어. 주말엔 갈게.'


나는 고민을 길게 했지만 답장은 정작 짧게 보냈다.


'조심히 다녀와.'

그래도 아내에게 먼저 메시지를 받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 이번 역은 삼포, 삼포역입니다.


때마침, 안내방송이 울렸다. 문득, 어제 들었던 대출상담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대출이 나오지 않을까 걱정하는 내게 상냥한 어투로 솔루션을 제공하는 그녀. 한데, 그녀도 나처럼 힘없는 피고용인일 텐데. 어쩌면, 지금쯤 이 열차 어딘가에 있을지도 몰랐다.

-열차 출입문 열립니다.


나는 늘 그래왔듯 모든 걸 뒤로 한 채 성난 발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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