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 가는 길 (2)

by epoche

낯선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객실 안으로 들어섰다. 간만에 탄 열차였다. 덜컥거리는 진동, 일정한 간격의 안내방송, 에어컨 바람, 심지어 누군가의 냄새까지도 낯설었다. 문득 나는 생각했다. 이토록 내가 간사한 인간이었나. 하긴, 이제는 어릴 적 함께 흙을 주무르며 뛰놀던 친구들도 어느새 SNS로만 근황을 나누는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가 아닌, ‘너와 나’로 각자의 영역에서 타인이 되어버렸다.


- 열차 출입문 닫습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술 때문이었다. 레일 위로 덜컥대는 소리가 더욱 성가시게 들렸다. 불현듯 며칠 전, 오랜만에 만난 대학 동창 선미와의 술자리가 떠올랐다.


- 너, 만나는 사람 있다며? 언제 결혼할 건데?


뻔히 내막을 알면서도 마치 몰랐던 척 얄밉게 묻는 솜씨는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나는 애써 웃으며 얼버무리려 했지만, 그녀가 쉽게 넘어갈 리 없었다.


- 왜? 남자가 아직 결혼 생각이 없대? 준비가 안 된 건가?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내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어딘가에서 본 듯한 시답잖은 드라마의 한 장면 같았다. 결국 나는 되는대로 뱉었다.


- 그냥... 이것저것 즐기며 혼자 살까 해.


그제야 선미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 그래, 너 능력도 있겠다, 뭐가 아쉬워서 결혼같은 걸 하냐. 그냥 편하게 혼자 살아.


그녀의 마수에서 풀려났지만, 내 속에선 무언가 무너지고 있었다. 이 모든 배후엔, '그'가 있었다. 영훈.


한숨을 푹 내쉰 뒤, 핸드폰을 꺼내 메시지함을 열었다.


'From 영훈: 미안, 또 떨어졌네... 보내준 케이크는 잘 먹었어. 고마워.'


익숙한 문장이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른다. ‘힘내라’며 깡총 뛰는 이모티콘을 곁들인 기프티콘조차 이제는 진심보다 의무가 되어 있었다.


울컥해 쓴소리를 하려다, 최근 요가 선생에게 배운 라마즈 호흡을 떠올리며 폰을 다시 가방에 밀어넣었다. 하지만 손끝은 여전히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영훈을 처음 만난 건 대학교 신입생 OT였다. 헌칠한 키에 깔끔한 맨투맨, 귀족적인 분위기. 억지로 술을 먹이는 선배들 틈에서도 부드럽고 차분한 태도를 유지하던 그. 살짝 발그레해진 얼굴로 내 이름을 물었을 때, 나는 결심했다. 이 남자를 반드시 쟁취하겠노라고.


결국 나는 다른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그해 봄 내 생일에 우리는 첫 키스를 나눴다.


그 후로 7년. 계절은 바뀌어도 그는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단단하게 무력해져 갔다. 자격증, 공모전, 인턴. 그 어느 하나도 결과를 내지 못했지만, 그는 늘 한결같은 어조로 말했다.


- 노력하고 있어. 나도 잘하고 싶어.


처음엔 안쓰럽고 보듬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두 번, 세 번 같은 장면이 반복되면서 나는 점점 지쳐갔다. 여전히 그를 사랑했지만, 동시에 증오도 피어났다. 애증은 결국 집착으로 변질됐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그를 위해 살아주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고시원 앞에서 도시락을 들고 서성일 때, 소심한 그를 대신해 불합격 메일을 열어볼 때, 나는 점점 더 시니컬한 사회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절정은 1년 전이었다. 내가 첫 직장에서 정규직 전환 소식을 들은 날. 그는 축하해주며 이렇게 말했다.


- 네가 백수랑 사귄다고 사람들이 뭐라 할까봐 좀 걱정됐어.


그 말은 걱정이 아니라 죄책감의 포장된 형태였다.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를 부정하는 건, 내 지난 시간을 부정하는 것과 같았으니까.


- 그래서 말인데, 우리, 잠깐 떨어져 지내보는 게 어때?


처음엔 속이 부글거렸다. 하지만 그는 덧붙였다.


- 그래야 내가 더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아. 우리 관계를.


결국 우리는 당분간 각자의 시간으로 돌아가기로 했고, 나는 느닷없이 잠정 솔로가 되었다.


며칠 뒤, 엄마와 카페에서 마주 앉았다. 엄마는 눈을 피한 채 커피잔을 저으면서 입을 뗐다.


- 너도, 영훈이도 참 착하고 좋은 애들이지. 하지만 좋은 사람들끼리 만난다고 해서 꼭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래도… 서로를 위해 좋은 마무리를 할 순 있잖니.


그 말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러자 엄마가 내 손을 잡아주었다. 아주 오래 전, 내가 자전거 타기에 실패했을 때처럼.


- 이번 역은 삼포, 삼포역입니다.


사람들이 출입문 쪽으로 몸을 돌리기 시작할 무렵, 내 시선이 한 남자에게 멈췄다.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얼굴. 가장 사랑했고 가장 미워했던, 내 기억 속 영훈의 얼굴이 겹쳐졌다. 그 역시 나를 보고 흠칫 놀란 눈치였다.


- 열차 출입문 열립니다.


그와 난 어느새 같은 방향을 향해 휩쓸려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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