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 가는 길 (Fin.)

by epoche

- 도착하면 바로 문자 해!


애증 섞인 작별인사를 얼빠진 듯 흘려보내고 열차에 올랐다. 차내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볐지만, 기묘하게도 내가 선 자리 앞좌석만 덩그러니 비어 있었다. 앉을까 말까 망설이다 결국 귀퉁이에 기대 섰다. 사람들 틈에서 잠시 자리다툼을 벌이고는 짝다리로 버텼다. 어릴 적부터 익숙한 편한 자세였지만, 그 삐딱함이 괜한 오해를 부른 적도 있었다. 성격이니 정치 성향이니 억지로 엮는 말들. 그런 것엔 딱히 관심도 없었다. 나는 그저 대학 4년 내내 자본주의를 공부했고, 삶의 구조처럼 그것을 받아들였다. 무게를 짊어진 듯 진지하게 세상을 설파하던 이들과는 어느샌가 조금씩 거리를 두게 되었다.


그땐 믿었다. 뭐든 노력하면 된다고. 하지만 취업 시장에서 반 년도 채 안 돼 그 패기는 “뭐든 하겠습니다”라는 읍소로 바뀌었다.


- 예, 부장님. 가서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때마침, 열차 안 어딘가에서 들려온 비슷한 목소리. 고개를 돌려보니 처연한 몰골을 한 아저씨가 구석에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간신히 직장에 들어가봤자, 펼쳐질 건 저런 뻔한 미래뿐. 하지만 그마저도 지금은 부러웠다.


- 지잉.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저리를 치듯 울었다. 보지 않아도 발신자는 유라일 터였다. 그녀의 진동은 이상하리만치 손끝으로 구분됐다. 메시지를 열었다.


'오빠, 요즘 취업 때문에 힘든 거 나도 알아... 그렇지만 그 무게 때문에 나를 내려놓겠다는 건 7년을 동고동락한 나로선 받아들일 수가 없어... 함께 이겨내자. 우리.'

무미건조한 폰트에도 그녀의 진심은 또렷했다.


내겐 너무도 과분한 여자였다. 처음엔 감격했고,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차츰 짙어지는 현실의 음영은 그녀의 이름 위에 그늘을 드리웠다. 확실한 건 오직 불확실한 미래뿐이었다.


숨을 내쉬듯 한숨이 나왔다. 짐짓 파이팅 넘치는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반대 주머니의 이어폰을 꺼냈다.

줄이 얽혀 있었다. 실타래처럼 감긴 이어폰을 풀어내느라 몇 번이고 손가락을 돌리고, 쓰다듬고, 때로는 툭툭 쳐보기도 했다. 지금 내 삶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듯한 그 줄기를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인생 진짜 줄같네.


기어이 줄을 풀어내고, 귀엔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 I once had a girl, or should I say, she once had me...


노르웨이의 숲. 처음 접한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동명 소설 때문이었다. 늘 서점 스테디셀러 한켠에 버티고 있던 그 책. 몇 해 동안 스쳐만 지나던 제목을 최근에서야 펼쳤고, 마지막 장을 덮은 날, 나는 그 노래를 반복 재생했다. 먼지 쌓인 방 안에서 동이 틀 때까지.


그리고 어제 저녁, 유라에게 이별을 말하러 가던 길도 그 노래와 함께였다. 굳이 몇 정거장 앞에서 내린 뒤 걸어서 목적지로 향했다. 익숙한 그 길 위에서, 나는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 우리 이제 그만 만나자.


이별에 대한 어떤 설명도, 예의도 갖추고 싶지 않았다. 시작에 이유가 없었듯, 끝에도 없어야 했다.

유라의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지만 곧 제자리를 찾았다.


- 그러면 뭐가 달라져?


의외였다. 평소 같으면 눈물이 먼저였을 그녀였다. 하지만 이날의 유라는 낯설도록 침착했다. 나는 당황했고, 말끝을 흐렸다.


-그냥, 이게... 맞는 것 같아서.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말없는 정적이 길게 흘렀고, 결국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 미안해.


- 그 얘기 들으려고 만난 거 아니야. 서로 잘잘못 따지기엔 우리 꽤 익숙한 사이 아냐?


유라의 '익숙한 사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쩌면 이 '익숙함'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손만 잡아도 설렜던 그 시절은 지나고, 사랑은 관성이 됐다. 불현듯 유라의 도톰한 입술이 눈에 밟혔다.


몇 시간 뒤, 나는 옆으로 누운 채 눈을 떴다. 어쩐지 팔이 저릿했다. 유라는 내 팔을 베고 잠들어 있었다.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린 팔을 슬쩍 빼보려다 실패했다. 몇 번을 시도하다 결국 체념했다. 차라리 이대로 썩어 문드러지면, 그때 도려내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녀를 떼어낼 수 있다면, 그 대가로 팔 하나쯤은 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때마침, 유라가 뒤척이며 잠에서 깼다. 잠결에 웅얼거리던 그녀는 이내 나를 보고 중얼댔다.


- 물 좀...


물을 건넨 뒤에도, 그녀는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선 샴푸 향이 은은하게 퍼졌다. 순간 충동처럼 그녀를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 아까 문자 오던데... 확인해 봐야 되는 거 아냐?


유라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 혹시 형욱이야?


그 순간, 침묵이 흘렀다. 공기마저 느려졌다.


사실 유라를 먼저 좋아했던 건 형욱이었다. 그는 표현이 빠르고 대담했다. 반면 나는 조심스러웠고, 뒤처졌다. 결국 유라가 내게 먼저 고백했고, 그렇게 형욱이가 아닌 내 곁에 머물게 됐다. 그러나 졸업을 앞둔 여름, 형욱은 이름만 대면 아는 회사에 합격했고, 나는 여전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그 무렵부터 그는 서서히 우리 사이를 파고들었고, 나는 초조해졌다. 불안감은 유라를 향한 감정마저 흐리게 했다.


물론 유라는 일찍이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혔었지만, 못난 나는 그보다 그녀에게 원망을 돌렸다. 어쩌면 분풀이 대상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가장 큰 죄를 뒤집어쓰는 건 흔한 일이다. 이제 더는 죄를 짓고 싶지 않았다. 빤히 가라앉을 배에 그녀를 묶어 둘 순 없었다. 마지막 예의는, 보내주는 일이었다.

- 유라야, 아무리 생각해도...


하지만 그녀는 내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으며 피곤하다고 했다. 나는 한참을 망설이다 말없이 방을 나섰다.


- 이번 역은 삼포, 삼포역입니다.


하필 출입문을 등지고 서있었다. 자칫 타이밍을 놓치면 못 내릴지도 모른다. 몸을 돌리려던 차 눈이 마주쳤다.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내가 아는 그 누군가와 닮은 여자. 아니다, 내가 놓았던, 아니 아직도 놓지 못한 그녀를 닮은 누군가와.


- 열차 출입문 열립니다.


우리는 어느새 같은 방향을 향해 휩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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