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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청랑 Aug 10. 2017

마지막 글

여기서 나는 너를 그만 쓰려한다. 

거의 3년이 지났다. 내가 너를 좋아했었던 시점부터. 

네 생일까지 며칠이 남지 않은 시점이자, 내 출국 시점으로부터 정확하게 10일이 남은 지금 

술김에 다시 열어본 나의 지갑은 지독하게도 쓴 뒷맛을 남기며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내 서랍 맨 안쪽에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던 그 지갑은 우리의 마지막 해외여행의 산물이자, 

네가 그때 그토록 잔소리하며 사지 말라고 했던 그 지갑이자, 

너와의 추억이 남아있는 유일한 물품이다. 


네가 나를 닮았다며 준 펭귄 모양의 귀여운 인형과 그 외의 작은 선물들은 이미 잃어버린 지 꽤 오래되었고 

술김에 궁금해서 눌러본 너와의 대화 내역 역시 이미 지워진 지 오래였고

컴퓨터를 포맷하면서 너와의 사진들과 그 외의 모든 것은 이미 다 사라졌었다. 

그렇기에 나에게 남은 너와의 추억은 내 지갑 속에 보관되어있던 편지와 사진 한 장이었다. 


이미 한번 보았어서 그런가, 사실 처음 지갑을 발견했을 때만큼의 느낌이 나지는 않았다. 

작년부터 사용했던 새 지갑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겨우 서랍에서 꺼내진 나의 옛 지갑이었기에 더더욱 

아무런 생각 없이 펼쳐보았었던 것인데. 그냥 정말로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아니 누가 세게 내 머리를 친 느낌이라고 해야겠다. 처음에는 더워서 그냥 너무 더워서 감성적인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음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사진 속의 나와 지금의 나는 사진을 바라보며 짓는 표정만이 반대 인체로 동일한 시간을 흘려보내는 느낌이었다. 한 손에는 편지를, 한 손에는 사진을 든 채로 천천히 의자에 앉아 한없이 그 사진을 바라보다 다시 툭 하고 서랍 속으로 던져버렸다. 그러다 짐 정리를 하는 지금 나는 다시 한번 지갑 속의 사진과 편지를 가만히 바라봤다. 


사실 두려웠다. 


이미 약간은 취기가 오른 지금 상황에서 과연 내가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할까라는 고민을 했고 

이미 내 주위에서 아픈 이별을 맞이했던 사람들의 글과 말에서 그들의 생생한 감정을 느꼈고 

이미 나 자신도 한동안 네가 내게 했던 말들에 둘러싸여 허덕였던 기억이 났었고 

그러면서도 만약 누군가 나를 좋아해서 미안하다고 했을 때 그게 너였으면이라고 기대를 한 나 자신이 싫었고 

잊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전에 헤어진 내 옛 애인들과는 다르게 너와의 관계는 내가 어떻게든 지우려고 했음과 그저 건드리지 않은 상태로 잊어버리려고 했음을. 차라리 남아있는 기록이 - 내가 술에 취하든 감정에 취하든 무슨 상태이던 너와의 기억이- 아니 내가 너의 소식을 알 수 있는 그 어떠한 수단도,  아무것도 없음에 차라리 감사했었음이 생각이 났다. 


 내가 너와의 관계를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이미 너와의 연락이 끊긴 지 한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더 이상 너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지 않음을 깨닫게 되었던 순간이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과 보내는 시간에서 내가 좀 더 행복하다고 느꼈기에 네가 나의 생일날 같이 있자고 했던 것을 거부했었고, 그렇게 천천히 너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선택했었다. 아니 애초에 우리는 멀어져 있었었다고 믿으며 네게 최대한의 피해를 주지 않고 말할 타이밍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가 한번 패닉 하면 얼마나 심하게 하는지 알았기에. 그리고 그게 나의 최대의 실수이자 우리의 사이를 너무나도 어긋나게 만들었던 선택임을 지금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나름대로 너를 배려한다고 그랬었음을 이제와 서야 변명해본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내가 더 이상은 네 편지를 보며 예전의 나를 그리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미련이 없다거나 그 어떠한 감정도 남아있지 않다고는 장담을 못하겠다마는. 몇 달 전의 나였으면 그랬을 테지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마치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듯, 그 사진을 본 순간 다시 가끔 네가 떠올랐다. 괜찮은척하며 네 안부를 물었었고 그냥 뭘 하고 사는지 물었었는데. 사실 나는 네 얼굴을 보며 다시 이야기를 하는 순간 어떻게든 울음을 터뜨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렇게나마 괜찮은 척하며 살았던 것 같다. 나는 아마 몇 년이 지나도 너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네가 단순히 너무 미워서라기보다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내 감정을 다시 바라 볼 힘이 없기에. 그냥 묻어두고 영원히 꺼내보지 않으려 한다. 차라리 너를 만나게 된다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 백지상태에서 시작하고 싶다. 


 네가 써준 편지를 읽고 차라리 너를 사랑하지 않았어야 한다 혹은 너에게 고백하면 안 되었었다-라고 말하지는 않겠다. 이제는 그런 생각조차도 들지 않으니. 그냥 사진을 바라보며 아 그땐 서로가 참 좋아했었구나라는 생각과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다고 믿어왔던 내가 차마 너와의 사진과 편지를 버리지 못하고 다시 원래 있던 대로 지갑에 보관하는 걸 보면서 너에게 지니는 내 감정이 뭔지를 모르겠음과 알고 싶지 않다는 게 공존한다는 사실만 믿고 기억하려 한다. 


참 아팠다. 네가 나에게 사실은 내가 너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고, 나는 네가 힘들 때 곁에 있어주지 못했다고 원망했던 게. 내가 부담스럽다고 사실은 내가 다가오는 게 너에겐 스트레스였다고 말했던 게. 그래서 그런가 많이 지쳤었다. 내가 너무 넘치도록 너에게 주었다는 것은 알지만, 스스로조차도 너에 대한 마음이 통제되지 않았었다. 네가 준 마지막 편지를 나는 열어봤었으면 안 되었었다. 그랬었다면 나는 그저 평생 너에게 미안한 마음을 지녔을 텐데. 하지만 네가 보낸 마지막 글을 읽고서 나는 너를 미워할 수밖에 없었다. 너는 나를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은 선을 넘어버렸었다. 


너에게 감정을 소비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쳤었다. 그냥 외면하고 네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그냥 아예 너와 관련된 모든 소식을 듣고 싶지 않았었다. 다른 이별한 사람들의 글을 읽어보면 다들 서로 미워하면서도 그리워하고 다시 같은 상황을 반복하지 않고 싶어 했기에 무시하고 그냥 계속 그리워했었는데. 나는 너와 이별한 후 그러지 않았었다. 


아니 사실은 잘 모르겠다. 이 모든 게 다 내가 혼자서 예민해서 괜히 술에 취해 쓰는 글일 수도 있고 내 첫 담배가 너 때문이었음을 떠올리면서 지갑이 남기고 간 그 쓴 뒷맛에 홀려서 지금만 이러는 것 일 수도 있다. 아니면 너와 서로 끌어안고 본 아름다웠던 별자리나 그 무수히 많던 좋은 날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변변찮은 데이트 한번 못해준 게 미안해서, 그래서 네가 그때 나중에 서로 시간이 나면 가자고 했던, 하자고 했던 그 무수히 많은 것들이 그 편지 안에 녹아있었어서. 그 감정에 괜히 동화돼서 이러는 것일 수도 있다.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어떻게든 나아질 거라고 생각했다. 차라리 피를 철철 흘리며 감정을 충실하게 감당해내면 내가 적어도 그만큼 성장해서 익숙해질 줄 알았다. 아니었다. 남들에게는 그게 가능했을 지라도 너는 예외였다. 너는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나를 더 옭아 맺다. 


그렇기에 나는 마지막으로 너에게 내가 여태껏 하지 못한 말들과 감정들을 한자씩 쏟아 내리듯이 적고 

앞으로는 다시는 너에 대해 글을 쓰지 않으려 한다. 차마 버리지 못한 우리의 사진처럼. 그저 어딘가에 묻어두었다 잊어버리고 다시 그 머나먼 어느 순간 우연히 열어볼까 한다.


이건 작별도 아니고 다짐도 아니다. 사실 하나도 모르겠다. 내가 네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그냥 쏟아낼 곳이 필요했나 보다. 네가 볼 수 있는 공간에서.  


생일 미리 축하해. 좋아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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