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2월 6일
오전 5시 12분
아직도 나는 잠에 들지 못하고 깨어있다. 삶을 이루고 있는 틀이 다시 비틀어지고 망가지기 시작하는 것 같다. 살아오며 나무블록을 조금씩 쌓으며 만들어온 탑이 흔들린다. 그 나무블록은 원래도 칠이 벗겨져 흉할 뿐만 아니라 깎여나가고 틈이 벌어져 나뭇결이 뾰족하게 튀어나와 나를 갑작스럽게 찌르곤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탑의 가장 위에 놓여 있던 것이 흔들리며 떨어져 나가 버렸다. 내가 가장 최근에 살아온 삶이 무너진 것이다. 그 자극을 받아 그동안 살아온 삶의 블록들이 중간에서부터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
밤이면 수면제를 포함한 안정제 등의 정신과 약물을 다섯 알을 먹지만 수면 문제는 나아지고 있지 않다. 이 상태로 7년을 살아왔다. 약을 먹어도 오전 4시가 넘어야 겨우 잠들었고 약을 먹지 않으면 단 1분도 잠을 잘 수 없다. 병원을 옮기기 전에 다녔던 병원의 의사는 내 이야기를 듣고는 잠이 올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몇 시간이든 가만히 누워만 있으라고 했다. 나는 의사의 말을 믿고 어둠 속에 가만히 누워 창문을 뚫고 들어오는 밤의 소음 속에 있었지만 결국 잠이 오지 않아 밤의 소음이 아침의 소음으로 변하면서 아침이 밝아오는 과정을 보게 되었다.
고민 끝에 병원을 옮기게 되었고 새로 만난 담당의는 잠을 자려고 누워서 20분이 넘어도 잠이 오지 않으면 일어나서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좋다고 했다. 혼란스러웠다. 길고 고통스럽고 답답했던 불면의 시간들이 떠올라 허탈했다. 여러 가지 검사를 한 후 새로 만난 담당의와의 초진이었기에 그가 나의 증상을 물었을 때 나는 '조현병'이라고 답했다. 내 입에서 튀어나온 조현병이라는 단어를 듣고 그는 깜짝 놀라더니 대체 누가 그런 말을 했느냐고 물었다. 전에 다녔던 병원에서 받은 진단이라고 하니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내게 조현병이 절대로 아니라고 했다. 나는 경계선 성격장애였다.
전에 다녔던 병원의 의사에게 분노를 느꼈다. 그 병원을 4년이나 다녔었는데 그 긴 세월 동안 잘못된 진단을 받아 잘못된 치료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게 처방받은 취침 전에 먹는 약을 먹으면 늦은 밤이나 새벽에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게 되고 아침이 되면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했지만 그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원내처방을 받았었는데 약 봉투에 약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았기에 내가 먹는 약이 무슨 약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에게 내가 먹는 약의 이름과 그 약이 어떤 것인지 질문을 해도 그는 내가 알아서는 안 되며 알 필요도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심지어 나에게 당신 같은 사람은 절대 결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을 했다. 2주에 한 번씩 오는 병원비와 교통비가 부담이 되어 4주에 한 번 진료를 받고 싶다는 생각을 말했을 때 그는 병원비가 부담이라면 자기가 '이 사람은 병원비를 부담할 근로능력이 없습니다'라는 소견서를 작성하여 병원비를 어느 정도 면제받게 해 줄 수 있다고 했다. 내가 그게 정확히 어떤 것인지 물었을 때 그는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정신장애 3급 판정을 내리고 정신장애인으로 등록하는 것이었다.
그가 무슨 의도로 내게 그러했는지 나는 전혀 알 수 없다.
다행스럽게도 지금 다니고 있는 병원은 3년 동안 증세가 많이 나아졌다. 병원에서도 주변에서도 나 스스로도 느낄 수 있는 커다란 변화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은 여전하지만 칼로 내 몸을 긋거나 약물을 과다복용 하거나 나를 파괴하고 싶은 욕구는 거의 사라졌다.
글을 쓰다 보니 벌써 오전 5시 41분이다. 다시 잠들 수 있을지, 잠든다면 몇 시에 깨어날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탑이 흔들리고 있으며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른다는 것이다. 어쩌면 탑의 윗부분만 조금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삶을 살아가면서 다시 탑의 윗부분을 쌓아 올리면 될 것이다. 그러나 완전히 모든 게 무너져 내린다면 나는 모든 걸 잃은 채 재가 된 나무의 흔적들을 바라봐야 할지도 모른다.
24년 2월 22일
오후 10시 23분
빗방울이 느리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비가 내리고 있지만 빗방울이 대기에서 흩어지거나 땅의 표면을 때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지붕이나 실외기에 고여 있는 빗물이 아래로 느리고 규칙적으로 떨어지는 작고 분명한 소리가 들릴뿐이다. 며칠 동안 하늘은 계속 희마하고 부드러운 회색빛이다. 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구름들에 완전히 가려져 가느다란 빛도 새어 나오지 않는다. 바람은 차가운 듯하면서도 시원하고 상쾌하다. 내가 좋아하는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이력서를 메일로 보낸 곳에서는 메일을 확인한 후에도 일주일 넘게 연락이 없더니 채용공고를 내렸다. 내가 면접조차 볼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무엇을 하며 돈을 벌 수 있고 내가 무엇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제는 동생이 집에 찾아왔다. 발코니에는 내가 가장 최근에 완성한 그림이 이젤에 놓여 건조 중이었다. 동생은 그림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리고 저 그림 이후로 새로 그리기 시작한 그림은 없는지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동생은 내게 왜 그림을 더 그리지 않았냐고 물었다. 나는 내 안의 텅 빈 공간 안에 두려움이라는 단어가 한 글자씩 또박또박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 때문에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을 하고 돌이킬 수 없어 괴로워한다. 두려움 때문에 내가 할 수도 있는 일을 놓쳐버린다. 내가 변화시킬 수도 있었던 일들. 나는 용기가 부족하다. 용기가 없어 항상 삶으로부터 도망치려 하고 나무에 목을 매달아 뇌사상태에 빠지지 않았던가.
내일은 정말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나는 내가 그럴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