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여행기 모음집 - 홍콩
일상과 여행의 차이점 중 하나는 후자의 경우 전자보다 훨씬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모든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고, 정해진 시간과 장소를 살아가면 되는 일상과 달리 여행에서는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낯선 곳, 낯선 언어, 낯선 사람들 속에서 정확하게 모든 상황을 예측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2주간의 인도 여행을 마치고 그리운 한국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는 델리에서 출발하여 홍콩을 경유한 후 인천으로 들어가는 에어인디아 항공편이었다. 델리에서 비행기를 타자마자 긴장이 풀린 나는 비행기의 경로를 표시하는 화면을 켜자마자 마취총에 쏘인 듯 잠에 빠져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비행기가 착륙하는 진동에 눈을 떴다. 화면에는 내가 탄 비행기가 대만의 가오슝에 착륙했다고 표시가 되어 있었다. 화면이 잘못된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홍콩에 전례 없는 태풍이 불어 비행기가 착륙하지 못해 대만에서 대기 중이었던 것이다. 비행기는 가오슝 공항에서 가만히 몇 시간을 대기했다. 나는 또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다시 잠을 깨니 홍콩이었다. 무사히 착륙은 했지만, 다음이 문제였다. 공항 상공의 태풍은 더 심해져서 홍콩에서 이륙하는 모든 항공편이 취소되었다는 것이다. 성질 급한 한국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가서 공항 직원을 붙잡고 화를 냈다. 공항 직원은 언제 비행기가 다시 뜰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고 추가적인 조치가 나오면 방송을 하겠다고 죄송하다는 말뿐이었다. 공항 직원도 당황한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머리를 한 대 맞은 표정으로 패닉 상태에 빠졌다. 시간을 보니 이미 한국에 도착했어야 하는 시간도 지나 있었다. 와이파이를 연결해보니 걱정하는 가족과 친구들의 메시지가 잔뜩 와있었다. 여행은 집 현관에 발을 딛는 순간까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것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은 이미 지나간 지 오래. 주린 배를 붙잡고 조금 더 기다리니 공항 직원이 식사권을 나눠주었다. 공항 내 식당에서 사용할 수 있는 한화 만 원 정도의 쿠폰이었다. 공항의 비싼 물가 때문에 쿠폰으로 먹을 수 있는 가장 괜찮은 음식은 버거킹이었지만 시장이 반찬이라 했던가, 햄버거를 먹을 수 있음에 감사했던 시간이었다. 나처럼 낙오자 신세인 한국인들이 몇 명 더 있었던 모양이다. 기다리다가 한국인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다. 처음 본 사이었지만, 함께 고생스러운 경험을 했다는 사실로 인해 우리는 급속하게 친해졌다. 다섯 명은 각자의 인도 여행 이야기를 하면서 기약도 없는 다음 방송을 기다리는 시간을 때울 방법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생각한 것이 바로 마법의 게임 ‘원카드’였다. 누구나 할 줄 알고 시간을 보내기 딱 좋은 게임. 우리는 돈을 모아 공항 매점에서 트럼프 카드를 사고, 공항의 한쪽 구석을 점령하고 원카드 게임을 했다. 그러다 보니 금세 저녁이 되었다. 간장 게장이 밥도둑이라면 원카드는 시간 도둑인가보다.
공항 직원이 에어인디아 탑승객들을 모아서 다음 방송을 했다. 비행기는 오늘 내에 뜰 수 없기 때문에 한국인 승객에게는 근처 호텔에서 숙식을 제공할 것이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불만 가득한 한국 사람들의 표정이 순간 멈칫하더니, 공항 직원을 죽일 듯이 쳐다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모두 온순한 초식동물의 모습이었다. 한편, 공항 직원은 같은 비행기에 탑승했던 인도 사람들은 비자 문제로 홍콩에 체류할 수 없어, 공항을 벗어날 수 없으므로 유감을 표했다. 즉 비자가 면제였던 한국인들에게만 호텔 숙박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순간 내가 대한민국 국민임이 자랑스러웠다. 자국 국민이 홍콩에서 비자 없이 체류하게 해준 대한민국 외교부의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함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는 예상치 못한 불행이 예상치 못한 행운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공항 직원이 버스를 통해 데려다준 호텔은 ‘오베어지 디스커버리 베이 홍콩(Auberge Discovery Bay Hong Kong)’이라는 4성급 호텔이었다. 호텔에서 방을 배정받으니 호텔 레스토랑에서 식사권을 나누어 주었다. 인도에서 도미토리룸을 전전하며 10,000원으로 삼시 세끼를 사 먹던 나에게 호텔 방에서의 숙박과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는 호화스럽기 그지없었다. 모든 순간이 꿈만 같았다. 공항에서 친해진 동생들과 식사를 하고 방에 들어가니 자정이 넘은 시간이었다. 버스는 새벽 5시에 출발한다고 한다. 호텔 창문으로 밤바람에 흔들리는 야자수가 보였다.
피곤했지만 이대로 잘 수 없었다. 친구들도 같은 마음이었다. 호텔 방에 들어가서 샤워를 하고 다섯 명은 다시 로비에 모였다. 몇 달 전에 홍콩을 여행한 적이 있던 나는 지금 시간에 홍콩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최고의 장소를 떠올렸다. ‘란콰이퐁(Lan Kwai Fong)!’우리나라의 이태원과 흡사한 란콰이퐁 거리라면 태풍이 부는 새벽에도 분명히 북적일 것이니 홍콩의 분위기를 느끼기에 제격이다. 그때부터 우리의 목표는 한 가지였다. 바로 새벽 4시 반 전까지 란콰이퐁에 다녀오는 것.
벌써 들뜨기 시작한 마음을 안고 가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우선 호텔 직원에게 물어보니 그는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디스커버리 베이에서 란콰이퐁까지는 거리가 꽤 있고, 지금 시간에는 택시도 잘 없으며, 새벽 4시까지 돌아오는 차편을 구하지 못하면 우리는 비행기를 놓치기 때문에 위험한 여행을 하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는 것이다. 타당한 지적이었다. 들뜬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선책을 찾아보기로 했다. 호텔 근처에 해변이 있으므로 그 해변에 가면 맥주라도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 터덕터덕 걸어 해변에 도착했다. 해변은 고요했다. 란콰이퐁의 풍경이 아른거렸지만 그래도 ‘지금 홍콩에 와 있다’는 기분 하나로 밤바다를 천천히 산책했다.
그때 한 선착장이 눈에 띄었다. 선착장 안으로 들어가니 전광판에 홍콩 센트럴로 가는 배편이 곧 도착한다고 쓰여있었다. 심지어 돌아오는 페리 시간까지 적혀 있어서 왕복 승차권을 사면 4시 반 전까지 무사히 호텔로 돌아오는 계획을 세울 수 있었다. 게다가 요금도 합리적인 편이었으니 행운의 여신은 아직 우리 편이었나보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인도의 각 도시에 흩어져 있던 우리 한국인 친구들이었다. 우리는 일정에도 없던 홍콩에 도착해서 호텔 방을 팽개쳐두고 밤거리를 구경하겠다고 맥주를 한 캔씩 들고 페리를 타고 바다를 건너고 있었다. 잠을 못 자서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처음 수학여행을 가는 학생의 마음처럼 설렘으로 가득 찬 순간이었다.
계획은 모두 성공적이었다. 태풍으로 인해 비가 왔지만 란콰이퐁의 화려한 네온사인은 비에 젖은 아스팔트에 반사되어 더욱 화려했다. 우리는 란콰이퐁까지 걸어가서, 란콰이펑의 바에 들렸다가 무사히 돌아오는 페리를 탈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했다. 예정된 날짜보다 이틀이 지나 있었다. 긴 꿈을 꾸고 일어난 기분이었다. 결항 소식을 들었을 때의 절망감과 호텔에서 숙박이 결정되었을 때의 환희, 그리고 우연히 페리를 발견해서 란콰이퐁으로 향할 때의 설렘이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2주간의 인도 여행을 마치고, 홍콩에서 보낸 하루짜리 ‘보너스 여행’은 인도에서 있었던 고생스러운 경험들을 모두 씻어주는 듯했다.
세렌디피티(Serendipity): 여행 중 뜻밖에 발견한 좋은 경험
세렌디피티(Serendipity)라는 말은, 여행하다가 우연히 찾은 좋은 경험을 의미하는 말이다. 여행은 불확실성의 연속이다. 불확실성은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기 마련이어서, 우리의 일상에서는 불확실성이 최소화되어 있다. 그런데도 굳이 불확실성이 가득한 여행을 떠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홍콩 여행에서 얻은 한 가지 해답은, 불확실한 불행과 더불어 우연한 행복이 찾아오기도 하기 때문이라는 것. 공짜 홍콩 여행은 인생에서 몇 번 찾아올까 하는 세렌디피티였다. 나에게 여행은 대부분 예상치 못한 일들 때문에 생긴 고생스러운 경험의 연속이지만, 혹시 다음 여행에서는 세렌디피티가 찾아올지는 또 모르는 일이다. 그런 마음 때문에 가방을 싸는 일은 항상 즐거운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