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한 여행기 모음집 - 인도(5)
나는 최소한 남들보다 비싸게 주고 사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경제학부를 졸업하고 경제학 직렬의 시험을 쳐서 합격한 내가, 대학교에 입학한 이래로 근 10년 동안 듣고 읽고 쓰고 말했던 것이 바로 ‘최소 비용-최대 편익’의 논리이다. 즉 ‘가성비’를 잘 따진다는 것인데, 나름 가성비에 일가견이 있는 나는 흥정이 필수인 나라, 인도에서 어느 정도 현명하게 여행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있었나 보다. 그렇지만 현실은 가혹했다. 나는 경제학과라는 타이틀이 부끄러울 만큼 비합리적이고 바보 같은 소비를 인도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하고 있었고, 나의 소비가 바보 같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항상 한참 뒤였다. 인도 여행에서 만난 동행 친구들은 나를 이렇게 불렀다. ‘바가지의 아이콘’
나의 첫 번째 바가지는 바로 헤나였다. 영구적인 타투와 달리 헤나는 잉크로 피부에 그리는 것이라 2주에서 3주 동안 계속되고 사라진다는 특징이 있다. 타투를 하기는 무섭지만 지워지는 헤나는 특별한 기분을 내기 좋아서 한국에서도 요즘은 꽤 찾아볼 수 있다. 인도에서는 헤나가 일종의 ‘신부 화장’ 같은 것이라 주로 여성들이 헤나를 받는다. 그렇지만 이를 모르는 여행자들은 값싸게 헤나를 받을 수 있고 덤으로 현지인이 된 것 같은 기분도 낼 수 있기에, 여행자들이 주로 찾는 골목에서는 어디서나 헤나를 해주는 사람을 찾아볼 수 있다.
인도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하고 싶던 것이 헤나였다. 그래서 여행 첫째 날 델리의 여행자 골목인 ‘파하르간즈’에서 헤나를 받으러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다행히 최소한의 이성은 탑재하고 있던 당시의 나는 바가지를 쓰지 않기 위해 길거리에 즐비한 ‘헤나꾼’들을 유심히 살피며 가장 선해 보이는 사람에게 다가갔다. 우선 자리에 앉지 않고 서서 별로 헤나에는 관심이 없고 가격이 비싸면 언제든 발을 돌려서 가버릴 수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기며 헤나는 얼마씩 하냐고 스리슬쩍 물어봤다. 헤나꾼이 보여준 가격표에서 잉크의 색깔별로 가격은 달랐지만, 가장 오래 지속되는 것은 가장 어두운 색깔의 잉크로서 ‘50루피(한화 약 800원)’라고 쓰여 있었다. 1000원도 되지 않는 가격 정도면 흥정할 필요조차 없겠다고 생각한 나는 고민하는 척을 조금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작은 여자아이가 아장아장 걸어서 헤나꾼에게 안겼다. 그리고 그 헤나꾼은 전형적인 ‘아빠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아이를 품에 안고 내 왼쪽 팔에 문양을 그려 주었다. 남아 있던 의심의 불씨는 작은 아기를 보자 완전히 사라졌다. 그래, 설마 자기 딸을 안고 사기를 치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하며 나는 안심했다.
그랬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기 딸을 안고서 사기를 치기도 한다. 그렇게 10여 분이 지나고 헤나를 선풍기로 말리고 관리상의 주의사항까지 들은 나는 계산을 하려고 50루피를 꺼냈다. 그때 헤나꾼이 갑자기 내 팔의 헤나 면적을 재기 시작했다. 가로 4인치, 세로 10인치 그래서 총 40인치라며 계산기를 두드리더니 총 2,000루피(한화 약 34,000원) 되겠다며 싱긋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황당해서 혀룰 내두르며 나는“아깐 50루피라며?”라고 화를 냈다. 그러자 그 헤나꾼은 가격표를 보여주는데, 가격표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inch’라고 쓰여 있었다. 인치당 50루피이므로 면적이 총 40인치, 그래서 2,000루피라는 논리였다. 거기에 자기는 인치라고 분명히 말했는데 내가 못 알아들은 것이라고 우기며 가격표까지 들이미는데 할 말이 없었다. 내가 보지 못한 잘못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너무하다고, 이건 아니지 않냐면서 돈을 내지 못하는 나를 그 헤나꾼은 자기 딸을 다루듯이 어르고 달래며 왼쪽 손바닥에 작은 헤나를 하나 더 ‘공짜로’ 해주겠다고 선심을 쓰는 듯 말했다. 공짜는 일단 받아야지 생각하며, 나는 양쪽 손에 헤나를 받아 한 시간 동안은 핸드폰도 만지지 못한 채로 델리 시내를 돌아다녔다. 그때 마침 소나기가 쏟아졌고 헤나꾼이 3주는 거뜬히 남아 있을 거라고 단언하던 3만원 짜리 헤나는 거의 다 씻겨 내려가서 그로부터 사흘 뒤에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른바 ‘인치 가격(inch price)’을 이용한 사기는 아주 흔한 수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여행 중반을 훌쩍 넘어서였다. 또 얼마 뒤에는 우다이푸르에서 인도인 신혼부부와 동행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3일 만에 지워지는 헤나를 2,000루피에 받았다고 사진을 보여주니, 이런 헤나는 자신의 신부가 공짜로도 해준다며 신랑이 배를 잡고 보는 내가 민망할 정도로 웃어댄 경험도 있었다.
2주 동안의 여행을 마치고 델리로 돌아왔을 때는 헤나의 가격이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지, 전형적인 헤나 사기 수법이 어떠한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받았던 헤나보다 훨씬 진하고 오래가는 헤나를 150루피(한화 약 2,000원)에 받을 수 있었다. 마지막 헤나를 받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궁금증이 생겨서 첫날에 갔던 거리로 가서 아기를 안고 헤나를 해주던 그 사기꾼을 찾아보았다. 사기꾼은 바로 그 자리에 그대로 태연하게 있었다.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지, 나를 보고, 헤나를 하지 않겠냐고 천연덕스럽게 제안했다. 나는 그 사기꾼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2,000루피. 기억나?”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고개를 푹 숙였다. 다행히 나의 거짓위협이 통했나 보다. 사실 겉으로는 당당하게 물어봤지만, 속으로는 무서워서 덜덜 떨고 있었다. 돈을 돌려받지는 못했지만, 죄책감을 심어주는 것만으로 통쾌했다고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며 바가지의 아이콘은 유유히 거리를 떠났다고 한다.